종교개혁에 앞장섰던 마르틴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을 때다. 한순간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을 때 그의 부인이 찾아왔다. 부인은 까만 상복을 입고 촛불을 들고 있었다. 누가 죽었는가 고 묻자 부인은 하나님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불안해하고 떨고 있는 걸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분명하다고. 부인의 말을 듣고 난 루터는 비로소 무거운 마음을 털고 자신을 추스렸다. 그리고는 담대하게 저들과 싸울 수 있었다. 그때 루터가 작사 작곡한 찬송이 384장이다.
누구에게나 걱정거리가 있고 책임이 있고 부담이 있다. 문제 없이 사는 사람이 없다. 벌레가 거미줄에 걸려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면 그럴수록 거미줄이 더욱 조여드는 것처럼 사람도 스스로 발목잡고 고통 받을 수가 있다. 문제 속에서 발버둥 치다보면 모든 기회를 놓치고 만다. 가끔씩 문제 밖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데도 그걸 잊고 산다.
내가 나 이면서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거기에 나 다운 내가 없다. 나는 나의 손님이 아니다. 나는 나의 노예가 아니다. 나는 오직 나의 주인 일 뿐이다.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가 나이기 때문이다. 대중 속에 개체이면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단독자가 바로 나다. 나는 무엇이며 과연 무엇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가, 나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 때문에 이곳에 서 있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상호관계를 나로부터 찾아내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이다.
일찌기 노자(老子)는 최고의 지혜, 최상의 총명이란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나를 터득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터득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부처 역시 너 자신을 등(燈)불로 삼으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영산(靈山) 파르나소스(Parnasos)밑에 아폴로(Apollo)신전을 세우고 이 신전의 현관 벽에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이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라는 말이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그리스 7대 현인 중 한사람이자 서양철학의 시조인 탈레스(Thales)로 전해지고 있으나 훗날 철인(哲人)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표어가 되면서 자기 성찰을 위한 경구(警句)로 통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지만 아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한 일이 나를 알아내는 것이다.
종교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고 철학은 모르는 것을 깨우친다. 결국 자아발견(自我發見)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의 삶, 나의 인생을 내가 알아서 살아간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나를 외면하거나 나를 떠나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나답게 산다고 하지만 살아온 흔적을 들여다보면 그게 아닌 걸 어떻게 하랴. 각오를 하고 결심을 하고 다짐을 해 본들 욕망에 끌리고 사물에 미혹(迷惑)된 나머지 본래의 나를 잃어버리는 게 탈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변하고 바뀌고 흔들린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인간의 약점이 아니겠는가? 내 마음 나도 모르면 그 마음을 내 마음이라 할 수 없다.
인간은 세상 무대에 올려진 지극히 가벼운 존재다. 세상 짐을 짊어진 존재가 아니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야 한다. 홀가분하고 부드러워야 한다. 그래야만 나를 소화할 수 있다. 내가 나를 이기는 것만이 나를 아는 길 같기에 해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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