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장스님(필라 화엄사 주지)
이 세상을 즐겁게 사는 것도 자신이고 이 세상을 슬프게 사는 것도 자신이다. 물론 사람들마다 자기 자신에게 허물을 돌리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허물들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허물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현재 처지를 단순히 현재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포함한 삼세를 다루고 있다. 과거를 정리할 수 있는 것도 현실이며 미래를 바꾸는 것도 현실이기에 이 중요한 현실을 좌우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교의 경전인 ‘원각경’을 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스님은 ‘무변허공이 각소현발이다’(無邊虛空이 覺所顯發이다) 주장하고 한 스님은 ‘무변허공에 각소현발이다’라고 주장하여 둘이 팽팽히 맞서므로 이를 해결해 줄 사람 없기에 신중 칠일기도를 지극정성 올렸던 것이다.
얼른 보기에는 단순한 ‘이’와 ‘에’ 차이지만 알고 보면 한 글자 때문에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기도 끝에 ‘무변허공에 각소현발’이라고 주장한 스님이 신장님의 철퇴를 받음으로 ‘무변허공이 각소현발’이라는 스님의 승리로 끝났는데 이것은 불교를 함축성있게 보여준 내용이라고 하겠다. 무변허공이 깨달음이라는 곳에서 나왔다는 것과 무변허공에서 깨달음이 나왔다는 것인데 바로 잘 살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신라의 원효 스님께서는 중국으로 불법을 구하러 가다가 한밤중에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다름 아닌 해골물이기에 순식간에 비위가 상하는 것을 보고 바로 자기 자신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것을 깨달은 것과 같이 우리도 세상을 바로 보고 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깨달음이 없는 생은 잡초와 같은 생이기에 생사윤회를 영원히 여읠수 없는 것이다. 넓고 깊은 불교에 발을 들여놓고도 깨달음을 바로 얻지 못하고 허송세월한다면 어느 때 다시 몸 받아 깨달음을 성취하여 생사윤회를 면할 것인가! 불교는 단순한 믿음을 넘어서서 자신을 바로 알고 실천하여 깨달음을 얻는 데 목적이 있으며 깨달음을 얻은 다음엔 무명에 휩싸여 생사윤회에 헤매는 중생들을 제도하자는 데 뜻이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바로 보지 못한 상태로 남을 제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자기 몸 추스르기도 바쁘기 때문에 남을 돌볼 힘이 없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을 등에 업고 허공을 날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불자라면
남을 제도하기에 앞서 자신부터 바른 깨달음을 속히 성취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집에서나 밖에서나 충실한 생활 속에 자신을 반조하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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