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등불’인 간디는 1930년 3월12일 소금행진을 주도했다. 인도의 염전을 강탈하고 생활필수품인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독점한 영국에게 저항하는 선전포고였다. 깡마른 간디가 무명천으로 몸을 두르고 지팡이를 짚고 맨발로 맨 앞줄에 서서 소금행진의 첫 발을 디뎠다.
이 때 그 현장에서 산 증인으로 피로 물든 파도물결의 행군장면을 생동감 넘치는 보도를 한 것이 용기 있는 뉴욕타임스 기자였다. 인도를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해방시킨 것은 비폭력 무저항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인도인들의 피로 물든 소금행진을 드러매틱하게 보도함으로써 세계의 시선을 모은 것은 언론의 힘이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한국 근대사의 불행한 사건을 살펴보자. 100년 전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 같은 운명의 구한말, 고종황제의 특사로 임명된 이준 열사는 이상설, 이위종과 미국인 힐버트와 함께 1907년 6월24일 제2차 세계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 야욕과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 침몰하는 국가의 위기를 건지려던 계획은 산산이 부서진다. 동맹국이었던 일본과 영국의 방해공작으로 회의장 문은 굳게 닫히고 그들은 참석을 거절당한다.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특사인 이위종이 회의장 광장 밖에서 국제 기자클럽에서 각국 기자들을 모아놓고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만행을 고발했다. 그러나 만국 평화 회의보에 실렸던 기사는 일본인들의 방해로 삭제되어 버린다. 언론에 외면당했던 특사들의 비극적인 종말은 식민지 시대, 동족상잔, 분단국가인 오늘로 이어진다. 세계 여론으로 확대시킬 수 없었던 힘없는 나라의 슬픔이었다.
이번 뉴욕타임스와 한국일보의 지면교류 협정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뉴욕타임스 기사를 한국 신문을 통해 읽는 미 주류신문과 한국 신문과의 접목은 한국 이민사에 획기적인 업적이며 모국어를 읽는 이민 1세들과 영어권 속에 살고 있는 이민 2세들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로 이민가정에 새 바람을 넣는 활력소가 될 것이다. 뉴욕타임스와 한국일보의 제휴가 한인사회와 주류사회의 공동체 네트웍을 만드는 징검다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박민자 /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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