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는 역린(逆鱗)과 같은 존재였다. ‘거꾸로 박힌 바늘’이라는 역린의 뜻 그대로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금기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사람들도 궁녀가 왕의 역린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여 제 정신이 아닌 한 그 누구도 궁녀 문제를 공개적으로 먼저 제의하지 못했다.”(신병호의 <궁궐의 꽃 궁녀> 중)
영화 <궁녀>(감독 김미정ㆍ제작 ㈜영화사 아침,㈜씨네월드)는 불과 100여 전 조선시대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작품이다. 궁녀는 말하자면 드라마 <궁>의 아름다운 ‘왕자 공주 놀이’가 가능하도록 돕는 존재였던 셈이다.
눈에 보이지만 마치 없는 존재처럼 취급되었던 그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소외돼있었다. <궁녀>는 그런 궁녀도 사람이라는 따뜻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궁녀의 말 못할 속내를 미스터리 공포로 파헤쳤다.
궁녀는 입궁할 때 임금에게 정절을 바치기로 맹세한다. 궁 안에서 남자 관계를 가져서도 안되고, 왕에 대해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왕 이외에는 함부로 죽을 수도 없는 ‘신성한’ 궁 안에서 월령(서영희)의 자살 사건이 발생한다.
내의녀 천령(박진희)은 월령을 검안하다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고 확신하고 이를 은폐하려는 감찰상궁(김성령)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혼자 수사를 해 나간다.
천령은 “죽은 자는 말이 없지. 그게 죽음의 미덕이지”라며 자살로 은폐할 것을 종용받지만 “제가 누워있는 것 같습니다”며 몸을 사리지 않고 수사를 해 나간다.
<궁녀>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밀실 추리소설처럼 한 사람씩 용의자를 쫓는 과정이 한 치의 지루함 없이 펼쳐진다.
월령의 룸메이트 옥진(임정은)과 옆방 친구로 월령의 노리개를 훔쳤다 광기에 사로 잡히는 정렬(전혜진),그리고 왕의 조카 이형익(김남진) 등을 한 사람씩 찾아간다. 월령이 15년 만에 왕에게 아들을 안겨준 후궁 희빈(윤세아)을 수발하는 궁녀라는 점에서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진다.
궁에서 함부로 남자를 만날 수도 없는 궁녀의 답답한 신세를 다룬 것처럼 보이던 초반과 달리 영화는 원자책봉을 위해 진실을 은폐하려는 거대한 음모처럼 보이기에 이른다.
<궁녀>는 미스터리와 공포를 결합한 묘한 사극이다. 이유 없는 공포감만을 주는 여름 공포물과는 다르다. 살인사건의 추리 과정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왕의 모든 허물을 다 알고 있는 궁녀의 입 단속을 위해 행해지는 ‘쥐부리글려’(규율을 어긴 궁녀를 처형하는 은밀한 관례)를 재현해 낸 것은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궁녀>가 김미정 감독의 첫 작품이라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촘촘한 짜임새가 영화를 보는 동안 쉼 없이 시선을 붙잡는다. 영화가 끝난 뒤 몇 가지 질문이 나온다는 점에서 다소 “어렵다”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문제 의식을 던진다고 본다면 그 역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김 감독은 이준익 감독의 연출부 출신으로 <황산벌><왕의 남자>를 준비하며 자료를 조사하다 세상의 반인 여자의 이야기가 없는 이유가 호기심을 갖고 상상력을 발휘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궁녀>는 재미와 문제의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수작이다. 더구나 신예 여성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영화계는 꽤나 큰 수확을 한 것으로 보인다.
웃음을 의도하지 않은 장면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곳이 몇 군데 있지만 흐름을 깨트릴 정도는 아니다. 18세 관람가. 1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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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한국 이재원기자 jjstar@sportshank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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