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문호 ‘궤도를 이탈한 겨울, 밤’ 전문
눈이 내린다, 물끄러미
눈 내리는 걸 보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나는 마음껏 떠나왔다
떠나온 거리만큼 집은;
밤과 낮의 간극 사이에서 일회용처럼 버려졌다
나를 버렸다는, 그래서
길이란 길은 모조리 폭설 속에 묻혀버렸다는
혐의 따위는 반성하고 싶지 않다
겨울이었으므로 불온不穩한 일기는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올라간 눈발 같은 혹은
꿈같은 것이었으니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책임과 의무 사이에서
짓눌러오던 고독을 버렸으니
두통은 깨끗이 물러갈 것이다 그리고
덜어낸 만큼의 눈이 녹을 것이다
나를 가두고 있던 집으로부터 떠나왔다는
해방의 포만감으로
길은 점점 가벼워질 것이다, 창 밖
휘어 꺾어진 밤사이로
우루루 몰려가는 불빛, 이제 그 꿈
어디론가 나는 걸어간다
그럼 아내 같은 집이여
안녕!
물론 꿈이지만, 가장은 눈을 핑계로 멀리 이탈하고 싶어 한다. ‘책임과 의무 사이에서/짓눌러오던 고독을 버렸으니’라는 표현으로 보면. 하지만 나는 이것을 역설로 읽고 싶다. 한순간도 집을 버릴 수 없었다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는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그러므로 ‘안녕!’ 아무리 인사를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아내 같은 집이므로. 그런 집을 버리고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한혜영 <시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