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손님이 와서 20달러짜리 지폐를 휙 던지며 말한다.
“잔돈! 1달러짜리 5개와 5달러짜리 3개!”
물건도 안사면서, 맡겨놓기라도 한 듯이 잔돈을 바꿔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우스 LA 인근에서 리커 스토어를 운영하는 P씨는 군말 없이 바꿔준다. 4.29 폭동이 일어난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턱도 없는 일이었다.
“그전에는 안 바꿔줬지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런 소소한 것들이 마찰을 빚더군요”
마찰이 생기는 이유는 같은 문제를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 미국에서는 보통 가게에서 잔돈 바꿔주는 것을 당연한 서비스로 여기는 데 반해 한인 업소들은 군일로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아예 거절을 하거나 바꿔주면서도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이런 사소한 일로 생긴 불쾌감, 무시당한 느낌이 종종 타인종 고객과 한인 업주 간 갈등의 불씨가 된다고 P씨는 말한다.
폭동 피해자였던 그에게 4월29일은 예사로운 날이 아니다. 당시의 절망감과 고통은 지금도 생생하다. 고생고생 해서 마련한 가게가 잿더미가 되었을 때 그는 “하늘이 무너진다는 게 뭔지 알겠더라”고 했다.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아 숨도 쉴 수가 없고, 소화가 안돼 먹을 수도 없는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보험에 가입한 덕분에 불탄 그 자리에 새로 가게를 지어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는 그는 더 이상 4.29를 ‘악몽’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4.29 겪으며 인생을 많이 배웠습니다. 나 혼자, 혹은 한인들끼리만 사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운 것이지요. 전화위복입니다”
많은 한인 업주들이 그러했듯이 그도 4.29 이전에는 어서 빨리 한푼이라도 더 끌어 모으려는 조급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손님은 ‘돈’으로만 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 타인종 손님은 단순히 돈을 벌게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이웃이다. 그래서 좀 손해를 보더라도 손님의 편의를 배려하게 되고, 이웃의 불량배들을 내 자식처럼 걱정하게 되며, 단골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솟아난다.
“분명히 다른 데서 산 걸 들고 와서는 바꿔달라는 경우들이 있어요. 전 같으면 !00% 안 바꿔줬지요. 이제는 거의 다 바꿔줍니다. 그리고 나면 고마워하면서 다음부터 단골이 되더군요”
‘주는 게 얻는 것’ - 그가 터득한 지혜이다.
동네 불량배들이 건물 벽에 낙서를 하면 전에는 당장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아이들을 불러 타이른다. 그리고는 낙서를 지우고 다시 또 낙서를 하면 또 지우기를 몇 번 반복하니 이제는 아무도 낙서를 하지 않는다.
가게에서 누군가 물건 훔쳐도 길거리까지 쫓아나가 몸싸움을 벌이던 것은 옛말이다. 감시 카메라에 물건 훔치는 장면이 있으면 사진을 뽑아 당사자를 불러 보여주면 대개 순순히 물건 값을 내놓는다. 그만큼 그 동네 사람이 된 것이다.
‘와서 돈만 벌어간다’고 비난받던 한인 업주들이 ‘같이 더불어 사는 사람’으로 이미지를 바꿔가고 있다. 진짜 주민으로 뿌리를 내려가는 것이다. 4.29라는 비싼 대가가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