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옥 (1960~) ‘민달팽이의 길’ 전문
김장배추를 다듬다 만난 놈
신문활자 위에서 벌거벗은 자신의 상황에 놀란 듯
더듬이를 마구 휘두르고 있다
예상치 못한 운명 앞에 당황한 것 같았다
희멀건 배추 속살에 붙어
느릿느릿 낮잠이나 즐기며 살아온 놈이
백주 대낮에 불려나와 곤욕을 치르고 있다
나는 맨몸으로 맞닥뜨릴 곤란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어
미끈거리는 몸을 신문지로 감싸 베란다 화분 속에 넣어 주었다
배 밑에 느껴지는 이끼의 감촉에 몸을 잔뜩 웅크린다
未知의 세상으로 몸 들여놓을 생각을 않는다
한번은 부딪쳐야 할 문제 앞에 망연자실한다
나는 저놈에게 어떤 결의가 생겨나
깨지든 이겨내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길 바랬다
며칠 뒤 베란다 청소 중에
한 뭉치의 철사를 풀어놓은 것 같은 은빛 선들
놈이 사투를 벌인 얼룩이었다
어디에도 민달팽이는 보이지 않고
살아남은 그 자리만 반짝거리고 있었다
민달팽이가 아니어도 나는 가끔 어리둥절 한다. 배추 갈피에 몸을 숨겼던 기억도 약간은 나는 것 같고, 껍질도 없이 고스란히 들킨 알몸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 넓디넓은 태평양을 건너 왔다는 생각을 하면 숨이 컥 하고 멎을 것 같다. 이런 게 내 인생서 한번은 부딪쳐야 할 문제였다고? 맞는 말이다. 얼룩 한 점을 남기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이는 중이라는 것도.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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