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춘 ‘끝물’ 전문
더덕 꽃은
울타리에 종소리로 매달려있다
백일홍은 씨방을 키우고
기다란 대궁에 늦옥수수 수염이 말라간다
나팔꽃줄기 매달린 전봇대 밑에
소리로 여물어가는 끝물,
해 오르기 전
축축한 참깻단을 베 온 아낙
톨톨한 가을볕을 만나야
뽀얗게 고스란히 빠질 것이다
입 다문 씨로 머문다는 것은
한 생의 제 소리를 마감하는 것,
지상에 매달려있는 울음이다
처마 위에 켜있는
한가위 달은
가장 큰 지구의 가로등,
꺼졌다 켜지는데 일 년이 걸린다
그림자가 내 몸을 끌고
달 속으로 환하게 들어간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씨앗인지요. 축축하게 젖으면 아프다고, 따글따글한 땡볕이면 터져야지 못 견디겠다고. 엄살에 이골이 났던 나는 벌써 달아나고 없는 걸요. 입 꽉 다물고 어떤 소리도 견디기 전에 쭉정이 깻단만 있을 뿐인. 그래서 오히려 흠씬 두들겨 맞을 일만이 남아 있는, 나는 도대체 씨앗이기나 했던 것인지요. 품고 견딜 일도 없으면서 벌써부터 끝물 소리나 들어야 하는, 나는……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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