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남 박사
동서문화센터 연구원
마침내 해방은 되었건만...
지난 60여년 동안 한국이 얼마나 큰 발전을 이룩했는가는 해방 직후의 실정을 살펴 봄으로서 짐작할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면서 갑자기 해방을 맞았다. 해방은 무시무시했던 식민지 지배가 끝났을 뿐 아니라 지긋지긋했던 일제 전시동원체제의 끝이기도 했다.
일본은 중국대륙과 태평양전역에서 8년간 전쟁을 벌이면서 쓸만한 것은 모두 빼앗아 갔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쟁터로 광산과 공장으로 동원했고 꽃다운 여성들을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어갔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날마다 전쟁훈련을 하느라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한 작가는 해방 당시 소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해방이 되어 기쁘다는 감회보다도 이제 지긋지긋한 솔뿌리 캐기와 방공호 파기는 안 해도 된다.”
해방은 곧 혼란을 가져왔다. 행정공백과 치안공백으로 모든 것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일본인 관리들은 달아났고 그들 밑에 있던 한국인 관리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수돗물이 안 나오고 전기가 끊어져도 어느 부서 누구에게 문의할 지 알 수 없었다. 시내 전차가 움직이지 못하고 청소부까지 화장실과 쓰레기를 치우지 않아 악취가 진동했다. 절도, 강도, 살인, 강간이 판을 쳤지만 경찰을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혼란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패퇴하는 일본인은 악심(惡心)이요 주체(主體, 한국인)는 무력(無力, 힘없음)이요 연합군(미군)은 상륙하지 않았으니 다만 파괴와 혼란이 있을 뿐이었다.”
“옳지 못한 조선 사람들이 있어 공장의 기계 부속품과 도구들을 훔쳐내다 팔아먹었다. … 공장의 작업은 정지되고 로동자들은 뿔뿔히 헤어졌다.”
일제가 물러가고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에서 무엇보다 “먹고 마시는 자유”가 우선이었다. 그동안 공출과 소비통제 등으로 쌀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문제가 된 것은 쌀의 과소비였다. 해방된지 불과 넉달만에 그해 추수한 쌀의 절반 정도를 술, 떡, 엿으로 낭비하였으며 쌀 수출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지주나 재산가를 적대세력으로 몰았고 기독교인, 지식인, 일제시대 관리 등을 숙청하자 1백여만명이 피난을 내려왔고 일제에 동원되었던 1백여만명도 귀국했다. 1,600만 이었던 남한인구는1년 후 2천 백만명으로 21퍼센트 급증했다. 그들 대부분은 몇몇 대도시로 몰려들어 도시는 주택, 식량, 일자리 부족으로 혼란에 빠졌다.
일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광산을 가동시키는데 필요한 기술도, 자본도, 관리능력도 없었다. 일본인들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약탈과 파괴가 난무하면서 많은 공장이 폐허로 변했다. 그리하여 제조업 가동률은 44%, 근로자는 59% 감소했고, 광산의 96%, 광산근로자의 97%가 감소했으며, 교통부문의 가동률은 82%, 교통부문 종사자의 87%가 감소했다. 산업생산은 해방 전에 비해 20% 수준으로 떨어져 경제가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생산과 무역이 사실상 마비되어 상점은 텅 비어 있었다. 생산된 것도 교통수단이 없어 소비자에게 공급되기 어려웠고 매점매석이 성행하여 시장질서가 송두리째 무너졌다. 북한에서 석탄 공급이 중단되자 열차운행도 공장가동도 할 수 없었고 비료공급이 중단되자 식량생산도 크게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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