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끝난 이틀 후 매주 모이는 어떤 모임에서였다. 회의 구성원은 약 70%가 백인, 20% 흑인 나머지 10%가 아시아계인데 온통 축제 분위기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축하한다고 악수하고 포옹을 나누는가 하면 “우리가 해 냈어”(We did it)라고 외치며 하이파이브도 한다. 오바마를 당선시키고 서로 하는 인사다.
흑인보다는 백인들이 더 열광적이다. 한 백인 회원이 일어나 “내가 이 나라에 살고, 미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럽다”고 눈물을 글썽거린다. 이렇게 이번 선거는 어떤 한 인종에게만 뜨거운 마음을 안겨 준 게 아니고 미국민 전체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물론 이번 선거에서 일리노이주 초선 연방 상원의원인 오바마가 보여준 지도력과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한 비전도 중요하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가 혼자만의 힘으로 대권에 도전하고 당선된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 오기에 넘었을 산이 여럿 이었고 또한 앞으로 넘어야 할 산도 많이 있을 것이다.
비 백인들이 미국에 살며 겪은 불이익은 셀 수가 없으리만치 많다. 아시아인으로 처음 가주 연방의원이 된 S. I. 하야까와의 아버지는 1900년 초 미국에서 목격한 일 때문에 미국을 등진다. 더운 날 옷을 잘 입은 아시아인이 식당에 들어가 맥주를 시켰다. 백인 바텐더가 잔뜩 맥주가 담긴 잔을 들고 와 그 사람 얼굴에 뿌리며 나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자식들을 키우면 큰일 나겠다고 하여 캐나다에 정착하고 아들을 세계적인 언어학자로 만들었다. 그는 나중에 대학 총장을 거쳐 상원의원이 된다.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 지역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사였던 김모씨는 텍사스에서 대학을 마치고 이곳에 정착했다. 그가 하는 무역업도 잘됐다. 데일리시티에 집을 사려했으나 비 백인한테 집을 팔지 못한다는 조항(restrictive covenant) 때문에 사지 못해 결국 백인 친구한테 돈을 주고 대신 사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흑인들이 육군 항공대에 조종사로 입대하려는데 흑인들은 지능이 낮아 비행기 조종을 못한다고 하며 거부당했다. 이를 보고 받은 엘리노어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이 흑인이 조종하는 비행기에 시승하여 문제는 해결됐고, 흑인들로 조직된 터스키기 비행단은 전쟁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다. 1950년대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가주에서 타인종과의 결혼이 법으로 금지되어 흑백 커플은 다른 주 특히 네바다 등지에 가서 결혼하기도 했다.
1960년대 월남전 당시 버클리 대학에서 ‘free speech’ 운동이 시작되었다. 백인에게서 일기 시작한 이 운동은 소수민족을 위한 인권보호 운동에 주류사회가 참여하는 효시가 됐다. 이를 기화로 흑인들의 정치, 경제 참여가 눈에 뜨이게 늘어났다. 백인 지식층과 젊은층이 주류에 반기를 든 것이다.
오바마는 4년 전 혜성처럼 나타나 초선 연방 상원의원이 되고 그의 자서전 제목인 ‘담대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처럼 대권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을 대다수의 투표자인 백인들이 받아들였다. 정말 감격스럽다. 정말 내가 한국계 미국 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아니 한국계가 미합중국 대통령될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이종혁
CSU 이스트베이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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