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아버지는 술이 약간 거나하시면 우리들을 앉혀놓고 신이 나서 손뼉 치시며 이 노래를 부르셨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이제와 생각하니 우리 아버지는 무척 예리하셨다. 딸과의 영원한 이별을 예지하신 듯 그 노래를 애창하셨다. 부모사랑 매몰차게 뿌리치고, 흘러가는 뜬 구름을 희망인 듯 부여잡고 단발머리 소녀는 홀연히 떠났다. 앞으로 불어 닥칠 세파도 아랑곳하지 않고 순풍에 돛단 줄 착각하고 머릿속에 각인된 ‘공부’라는 깃발을 향해 돌진했다. 용감하게 돌파한 38선, 그 너머에 험한 준령이 고대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고국에서의 30년 세월은 고해였다. 뜻하던 향학에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외로움에 지친 나는 드디어 결혼해서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 후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이민길에 올랐다. 이민생활은 버거웠다. 봉재공장, 캐리아웃, 리쿼스토어를 전전하며서… 봉제 일을 할 때에는 집에까지 일감을 끌고 가서 밤샘을 밥 먹듯 했다.
드디어 리쿼스토어를 낼 때는 남편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10여 만 불의 거금을 얻어가지고 그 고마움에 힘입어 정신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모름지기 그때에 온 모든 이민자들은 같은 경로를 겪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시절에는 교회에 나가는 것도 시간이 아까워 못 나가니까 이담에 늙어서 은퇴하면 가겠다고 사양했었다.
그때까지 건강을 자신하던 남편을 갑자기 병마가 엄습했다. 그동안 검진도 하지 않고 살아온 무관심이 한스러웠다. 위암 말기라는 청천벽력은 온 집안을 뒤집어놓았다. 자영업자이면 누구나 겪는 타민족과의 갈등을 비롯하여 권총강도의 침입, 스트레스와 과로 등으로 무쇠라도 견디어 내기 어려웠다.
의사는 남편의 병세를 그에게 알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게에도 안 나가고 희생적으로 간호했으나 남편은 기여코 나를 등지고 말았다. 그 결과로 가게는 파산으로 치달았다. 설상가상으로 아들의 사고사가 잇따랐다. 마지막 얼굴도 못 본채 저승으로 나 몰래 보내어졌다. 그 상황에서 살아남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 한 내가 한스러워졌다.
지난달에 시니어센터에서 상을 탔다. 그때 인터뷰에서 가족사항을 말하다 아들 얘기가 나와서 그대로 말했다. 그랬더니 딸들이 “왜 그 끔직한 사실을 알리고 괴로워하느냐”고 야단들이다. 어떻게 살면 잘 사는 건지 나도 알 수가 없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이 만민의 환호 속에
열렸다. 그의 나이가 47세란다. 내 아들과 똑같은
나이다. 나도 모르게 죽은 아들의 나이를 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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