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가는 친구와 밤늦도록 마셨다.
잘 살라고 마시고 잘 살겠다고 마셨다.
헤어질 때는 모국어로 인사했다.
잘 가라고 울었고 잘 있으라고 울었다.
떨어진 눈물 속에선 조상들도 울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엔 사람 하나 못 만났다.
30년 넘도록 걸은 밤길을 발길마다 헛디뎠다.
박 씨네 골목 앞까지는 그런대로 잘 왔다.
시궁창을 건너뛰다가 기어코 미끄러졌다.
껴안을 동포 맞듯 진구렁에 뒹굴러댔다.
진짜 조국의 흙을 난생 처음 만져봤다.
새파랗게 젊은 아내가 새파랗게 질려 맞아들였다.
온몸이 온통 흙의 사상(思想)이네요 했다.
그 말에 갑자기 한반도(韓半島)가 방안으로 밀려들고
모두 다 이민 가버린 땅을
두 사람의 한국인(韓國人)이 지키고 있었다.
-김대규(金大圭)
화자(話者)속의 김대규 시인은 이민가는 친구와 밤늦도록 작배를 들고 헤어질 때는 모국어로 인사까지 했지만 박 씨네 골목 앞까지는 잘 와서 그만 취기에 시궁창을 건너뛰다 발을 헛디뎌 기어코 진구렁에 넘어져 뒹굴었다. 그러나 오히려 난생 처음 조국의 흙을 흐뭇하게 만져봤다는 김대규 시인! 온몸이 진흙덩이로 뒤엎인 그를 아내가 “온몸이 온통 흙의 사상이네요!”라고 너그럽게 대해주는 말 너무나 감동 깊은 애정에 찬 문학적 가치도 풍부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더 나아가서 한반도가 방안으로 밀려들어 모두 다 이민 가버린 땅을 두 부부 한국인이 굳건히 조국을 지키고 있겠다는 결의는 참으로 배달민족의 혼을 기리는 불멸의 의지라고 봐도 손색이 없겠다.
김대규 선생은 1942년 경기도 안양 출생으로, 연세대 국문과,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고, 안양여고, 연세대 강사를 역임했다. 1960년 시집 ‘영(靈)의 유형(流刑)’으로 데뷔. ‘시와 시론’ 주간, 흙의 문예상, 경기도 문화상수상. 경기도 시민협회장, 안양상공회의소 근무. 저서에 시집 ‘이 어둠속에서의 지향’ ‘양지동 946번지’ ‘견자(見者)에의 길’ ‘흙의 사상’ ‘흙의 시법(詩法)’ ‘오 어머니 나의 어머니’ 등이 있으며, 지금도 그의 고향인 부천에서 문학의 꽃인 시론(詩論)을 강의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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