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 과테말라에 의료봉사 차 다녀왔다. ‘영원한 봄의 나라’라는 애칭을 가진 과테말라는 중미에 있는 마야문명의 심장부이다.
찬란했던 고대 마야문명은 1524년 무적 스페인의 침략을 받았다. 스페인은 과테말라를 식민지 삼고 1543년 안티구아 도시에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그 당시 포장된 돌길이 오늘날도 사용되고 있으니 당시의 대 역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을지 짐작이 간다.
근대의 잔인한 혼혈 식민통치와 현대사의 계급 갈등, 유혈 내전은 국민들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독한 가난으로 내몰았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고대 마야의 태양신에게 심장을 찔려 바쳐졌던 젊은이들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 과테말라를 상징하는 새인 ‘께찰’의 가슴에는 붉은색 점이 있다.
우리 봉사팀은 안티구아에서 더 깊이 들어가는 마을을 돌면서 의료, 미용, 어린이 사역들의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우월하여 무엇을 나누어준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들의 문화를 배우며 고통을 같이 나누기를 힘썼다.
의료진이 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순식간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의료팀은 혈압과 당뇨를 검사하고 통역자들을 통한 간단한 진료 후 약을 나누어주었다. 물론 건강 상담과 교육도 빼놓지 않았다.
단순히 비타민이나 구충제를 얻으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급성 장염으로 인한 심한 탈수증, 폐렴, 심한 피부 염증으로 화농이 온 몸을 덮은 중증환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매일 아침 일찍 진료를 시작하고, 많은 통역인들과 다른 의료인들이 도와줌에도 환자들은 좀처럼 줄어들 줄 몰랐다. 점심 후에는 피곤과 졸음이 쏟아졌다. 오후 늦은 시간까지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자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통역하는 사람을 데리고 기다리는 환자들을 직접 대면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모두 다 기다리느라 지쳐서 눈빛에 실망감이 담겨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쳐 보이는 젊은이를 뒤쪽에서 발견했다. 몇 마디 물어보니 폐렴과 심한 탈수증임을 알 수 있었다. 증상이 심해 먹는 약으로는 부족한 데 순서를 기다렸다가는 주사약과 링거수액을 투여할 시간이 없었다.
젊은이를 줄에서 빼내 따라오게 하여 교실 안 간이침대에 눕혔다. 그의 얼굴에는 갑작스럽게 의사를 만나고 뜻하지 않게 순번이 바뀐데 대한 놀람과 기쁨의 표정이 섞여 있었다. 환자에게 항생제와 링거액 주사를 시작하자 두세 시간 만에 탈수증상이 좋아지면서 혈색이 달라졌다. 그의 눈 속에서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과거 내가 겪었던 뒤바뀐 순번의 고마운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가 고등학생 때였다. 감기에서 시작된 폐렴으로 몹시 아픈 적이 있었다.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 때문에 동네 약국에서 기침약만 사먹고 있다가 증세가 나빠졌다. 병세가 더욱 악화 되어 보건소에 가서 접수를 하고 긴 줄 뒤에 지쳐서 앉아 있는데 여자 내과 선생님께서 갑자기 나를 먼저 불렀다. 그리고는 진찰을 하고 주사를 놓고 약을 지어주셨다. 그 하얀 가운의 선생님 모습이 너무나 훌륭하고 멋있어 보였다.
또 진료비 때문에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직원들에게 뭐라고 이야기 하시더니 걱정 말고 가라고 하셨다. 나는 어머님과 함께 그 자리에 한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때의 뒤 바뀐 순번 사건과 선생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나는 의사가 되었다. 그 후에도 나는 많은 예상치 못한 사랑의 사건들을 경험하며 살아왔다. 예상치 못했던 은혜의 사건들이 나로 하여금 바쁜 삶 속에서도 오지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향해 달려가게 한다.
김홍식 /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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