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용어는 헬라어 에클레시아의 번역이다. 에클레시아의 개념은 건물을 의미하지 않고 같은 신념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교회라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공간적 장소로서의 이해를 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교회는 점차 신이 임재하고 계신 장소, 즉 성전(Temple)으로 이해하고 있다. 교회에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교회에 가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교회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교회는 점차 ‘거룩한 울타리’를 치는 우를 범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악한 곳, 교회는 거룩한 곳이라는 이분법에 따라 세상의 악이 거룩한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견고한 울타리를 쌓았다. 교리주의와 교단주의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교회는 세상의 악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러한 교회의 울타리를 쌓았지만, 문제는 악은 밖으로부터 들어온 것이 아니라 교회 울타리 안에서 자생하게 되었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다. 내가 여기서 심각성을 강조하는 것은 밖으로부터의 악은 쉽게 발견하고 쉽게 그 악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자생적으로 발생한 악은 쉽게 발견하지 못하고 설령 발견한다고 해도 자신의 치부와 죄악상을 드러내거나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종교인들의 근원적 약점(?) 때문에 그 악을 제거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악을 감추려 들려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교회의 위선이 등장하였다. 위선의 마수걸이에 걸린 교회는 이러한 것들을 감추기 위해 신적인 카리스마를 남용하여 신자들을 위협(?)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종교적 기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악한 곳이라고 포기하신 적이 없으시다. 오히려 이 세상을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런데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세상을 포기한 것처럼 행세 하였다. 세상은 악한 곳이기에 쳐다보아서도 안 되는 곳이라고 가르쳤다. 정치참여와 사회참여를 불경건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을 포기했다고 하면서도 이들은 교회 밖으로 나오면 치열하게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열해진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위선이 등장하게 된다. 신자들은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비열감과 죄책감을 무마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더욱 더 종교적 의식에 매달리게 된다. 거의 세뇌에 가까운 종교적 치유를 갈망하기까지 한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광적인 모습의 근원적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주변을 보라! 종교적 열정이 강렬한 신자에게서 종교적 위선과 불일치를 더 많이 발견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룩성은 무엇일까?
거룩성은 깨끗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룩성은 더러움을 전제로 한다. 진정한 거룩함은 더러움 속에서 존재한다. 신의 거룩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적인 존재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아야 하는 세상으로 들어와 더러운 죄와 위선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참 구원을 보여주고, 참 빛을 밝혀주고, 참 길을 제시해 주었던 데에 있다. 이것이 종교적 거룩성이다.
교회는 거룩하여야 한다. 악과 단절된 채 고고함을 지키는 거룩성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악과 싸우며 선과 의를 지켜낼 때에 교회의 거룩성은 비로소 진정한 거룩성이 되는 것이다.
조명철
수도장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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