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한파 때문에 날씨가 더 쌀쌀하게 느껴진다. 그런 와중에 의료개혁 논의가 한창이다. 무보험자들을 생각하면 개혁도 대 혁명적인 개혁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싸늘한 계절이 돌아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잊을 수가 없다. 어느 날 한인 남성 김씨가 배가 아파서 병원응급실로 들어왔다. 응급실 의사가 검사를 해보니 대장을 수술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보험이 없는 한인 환자이다 보니 주치의를 맡아주어야 할 한인 의사를 찾게 되었고 나에게 연락이 왔다. 병원에 가서 환자를 살펴보니 급하게 수술을 해야 되는데 보험이 없다고 약을 받아 집에 가게 해달란다.
내가 미국에 처음 와서 보험도 없고, 직장도 없는 상황에서 맹장염에 걸렸던 때가 생각났다. 나도 그때 응급실에서 만난 외과의사, 닥터 황께 똑같은 소리를 했었다. 당시 황 선생님이 해주시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김씨에게 반복했다.
“사람은 살고 보아야 합니다. 아무 소리 말고 수술하세요”
그는 무척 망설이는 표정이었지만 대안이 없었다. 인근의 선배 외과의사에게 부랴부랴 연락을 했다.
“선배님, 보험 없는 불쌍한 환자가 있는데 내 얼굴을 봐서 수술 좀 해주세요”
이런 염치없는 연락을 자주도 했건만, 역시 의리의 한국인, 외과 선배님은 군소리 없이 응급수술을 해주셨다.
수술이 끝나고 환자의 상태가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매일 병원에서 진찰 도중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서류미비자인 것을 알았다. 갖가지 신분증을 살짝 바꾸어서 쓰고 있는 중이었다. 또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만날 때마다 그의 몸 상태는 좋아지는데 그의 한숨은 무거워져만 갔다. 드디어 퇴원 날짜가 다가왔다.
“선생님, 어쩌면 좋지요?”
“나가서 조금씩이라도 갚으세요”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될 거예요. 신분도 탄로 날 것이고요”
나는 그가 간직한 모든 비밀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외과 선배님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나에게 비상벨이 없는 비상구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때는 비밀 카메라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나는 환자에게 “김 선생님, 저기에 있는 문이 비상구로 통하는 문입니다. 별로 감시 장치가 없어요. 내일 아침 7시와 8시 사이에 간호사들 교대가 있으니 별로 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마주치는 그의 눈이 반짝였다.
다음날 아침 8시30분쯤 회진을 돌기 위해 그 병동에 갔더니 간호사들이 김 아무개 환자가 없어졌다고 걱정들이다.
나는 그 날 하루 종일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과 신부 미리엘을 생각했다.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치다가 전과자로 낙인 찍혀 개보다도 못한 신세로 전락한다. 그런 그에게 성당의 미리엘 신부가 도움을 준다. 그러나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사제관의 은접시를 훔쳐 달아나다 헌병에게 잡혀 신부 앞으로 끌려온다.
그 절박한 순간, 신부는 헌병에게 “은접시는 내가 준 선물이네”라고 거짓 증언을 한다. 덧붙여 “은촛대는 왜 안 가지고 갔나?”라며 장발장에게 은촛대까지 내준다. 그 자비와 사랑으로 장발장의 모든 적개심과 굳은 마음은 녹아내린다.
그날 밤 장발장은 울고 또 울다 한 줄기의 빛을 본다. 그리고 그는 새로 태어난다. 후에 장발장은 자유, 평등, 박애정신에 입각한 프랑스 혁명을 경험한다.
요즘도 나는 병원에서 나올 때마다 ‘김발장’이 이용했을 비상계단을 걸어 내려온다. 잠깐이라도 운동을 하기 위함이지만 그때마다 미리엘 신부를 용서해 주신 절대자가 나의 죄 또한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김발장’도 용서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 어디선가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으리라.
김홍식 / 내과의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