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 삼촌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큰 삼촌 존과 작은 삼촌 희가 숨을 헐떡이며 그 뒤를 따랐다. 자정부터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걸었으니 여지껏 쓰러지지 않은 것이 여간 다행이라고 얼 삼촌은 생각했다. 산 아래로 보이는 나루터에는 금새 떠날 준비를 하는 어선이 보였다. 얼 삼촌은 숨을 크게 내 쉬었다. 뒤에서 달려온 두 삼촌이 땅에 펄썩 주저앉았다.
삼형제는 이렇게 해서 1920년 금산에서 인삼을 재배하는 부농의 아들로서 일제의 압박과 탄압을 피하여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 이민을 떠나게 됐다. 군산항을 출발하여, 인천으로 상해로,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까지 왔다.
피나는 노력과 노동으로 10년 만에 얼 삼촌은 큰 농장의 소유주가 되며 사진을 통한 중매로 숙모와 결혼을 했다. 존 삼촌은 무쇠같이 노동을 하며 희 삼촌을 법대에 보냈다. 이때 이화여고 선생을 지내던 여동생 루이스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남가주대학에 유학시키고 루이스 이모는 트럭을 몰고 과실을 도시로 나가 파는 일을 하면서 학비를 대었다. 희 삼촌은 상류 가정의 백인 여인과 열애에 빠지게 되었고 한국인들과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결혼해서 형제들로 부터 영영 떠나가는 불운을 겪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애국청년들이 점차 미국으로 망명 하거나 유학생으로 미국 땅을 밟게 되며 캘리포니아에서 초기 이민노동자들로부터 적극적인 경제적 도움으로 대학을 다니거나 애국운동을 했다. 그중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킴 브라더스는 유학생들뿐 아니라 애국청년의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 얼 삼촌은 루이스 이모를 도와 조국에 학교를 세워 국민 계몽과 교육에 그의 모은 재산을 다 쏟아 부었다.
초기 노동 이민자들은 자기 가족보다 조국을 더 위했다. 그들이 일당으로 번 돈을 그대로 독립운동에 헌납하면서 거의는 자신을 돌보며 돈을 모으는 일에는 개의치 않음으로 끝내는 빈곤 가운데서 근근이 연명해 가는 분들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그리고 쓸쓸히 삶을 마감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민 2세로 고국을 떠나 샌프란시스코 비행장에 내릴 때 부풀은 나의 꿈은 삼촌들이 그 옛날 집을 뛰쳐나와 꾸었던 꿈과 다를 바기 없었다.
이글거리는 7월의 태양이 아침 샌프란시스코만의 푸른 바다와 하얀 넓고 넓은 활주로 위를 눈부시게 했다. 군사정권의 독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쁨이 가슴속으로 벅차게 밀려 왔다. 써니배일에 있는 누님 집으로 갔을 때는 온 햇빛을 빨아 들일 둣한 큰 창들이 새로운 세계로 막 열려가는 두려움을 덜어줬다. 그리고 나의 편협성과 아집을 무너트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민 1세들과 다를 바 없이 닥치는 대로 굴러갔다. 학교로, 도서관으로, 직장으로, 군대로 의과대학으로, 수련으로, 병원생활로, 많은 도시를 돌며 30년의 세월이 갔다. 이제 불현듯 떠나온 조국을 생각한다. 부끄러운 때도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더할 나위 없이 발전한 조국을 바라보며 주름살이 늘어가는 눈가에 저절로 미소가 흐른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이곳에 나의 선조들처럼 묻혀야 할 것이다. 조국을 영원히 그리워하면서, 약동하는 우리의 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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