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일이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반강제적으로 월남 전쟁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추운 겨울철에 월남 참전을 지원하는데 무슨 혹한기 교육이 필요하겠냐고 했지만 그래도 차출병력인지라 강원도 춘천에서 그리 멀지않은 오음리에서 월남 전투에 대한 교육과 실습훈련을 2달에 걸쳐 받았다. 너무나도 추웠던 겨울이라 수색작전과 땅굴작전 연습을 두 달에 걸쳐 받았다.
그러나, 사실상 땅굴작전 연습은 별효과가 없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모든 교육이 순조롭게 끝나고 월남 전선으로 떠나는 날만 남았다. 마음이 뒤숭숭 하기만 했다. 남아 있던 용돈은 교회에다 헌금을 했다. 그때는 비록 신에 대한 건 잘 몰랐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듯싶었다.
떠나기 며칠 전에 큰 형님한테만 연락해 놓고 3남 유찬이는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월남전에 참가한다고 했다. 그때 떠나는 날이 음력으로 설날이었다. 오음리에서 3시간 정도 걸려서 춘천역에 도착했다.
그 후 3, 4시간정도 지났다. 창밖을 내다보니 중학교 학생들이 손에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무사히 다녀오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런 전송 속에 군용기차는 떠나고 있는데 내 가슴은 왠지 착잡하기만 했다.
이제 떠나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정들은 우리 동네 우두동, 내가 다닌 춘천시의 학교들, 서울 갈 때면 언제나 이용했던 춘천역 등등. 평소에는 그냥 스치고 다녔는데 죽어서 돌아올지도 모르는 월남 땅으로 전쟁터로 향한다고 생각하니 착잡한 생각이 깃들었다.
이런 저런 잡념에 잠기다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두리번거리면서 걸어 다니는 여자분이 눈에 띄었다. ‘아! 어머니다.’ 나는 그대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나는 3남이니까 괜찮다고 어머니를 위로했다. 어머니는 자식은 다 똑같다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그때 어머니 손에는 2개씩의 기계떡, 앙꼬모찌, 쌀강정이 들려있었다. 나는 장병들과 나눠 먹으려고 어머니를 찾으려 다시 나가니 이미 어머니는 택시타고 떠나간 뒤였다.
가져온 음식은 전우들과 나눠 먹었다. 그 후부터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언제나 설이 되면 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아리다.
그런데 정초가 되어서 집사람이 느닷없이 갈비를 재우고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야단법석이다. 정월 초하루는 벌써 지났는데 웬 일이냐고 물었더니 의과대학 졸업하는 아들 위해 마련한단다.
아주 옛날의 내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여자들은 어쩔 수 없이 어머니로 자리매김 하는 존재라고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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