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LA 계신 어머니께 안부전화를 드린다. 첫 신호음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수화기를 드신다. "아범인가?" 어제 드렸는데도 오후 내내 기다리신 듯 하다. "바쁜데 왜 또 전화했니." 하시면서도 목소리가 밝으시다. 팔순 노모의 전화 목소리에서 옛 젊었던 어머니의 활기가 느껴지면 내 마음이 한결 가볍다.
"오늘 어떻게 소일(消日)하셨어요?" "아범아, 나 오늘부터 소일 않기로 했다". 무슨 말씀인가? "소일은 하는 일없이 세월을 보낸다는 뜻이 아니냐. 앞으로 석음(惜陰) 하기로 했다. 석음이 뭔지 알지?" 선뜻 답을 못하고 말뜻을 입안에서 굴려본다. "석음이란 세월(陰)이 헛되이 감을 애석(惜)하게 여겨 시간을 아껴 소중히 보낸다는 의미란다. 오늘 동양화 시간에 선생님한테서 배웠다."
생각하면 어머닌 평생 석음하며 사셨다. 가난했던 당시 우리네 어머니들이 거의 그러셨을 것이다. 내 기억에도 어머니가 편히 발뻗고 주무신 날이 없었다. 6.25때 결혼 1년만에 남편이 납북 당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 속에 사실 때도 그랬다. 매일 새벽이면 북녘을 향해 엎드려 남편의 안위를 비는 기도로 하루를 여셨다. 그리고 피붙이인 나를 업고 피난민들이 들끓는 국제시장 모퉁이에서 잡화 좌판을 편 채 생존하셨다.
납북된 젊은 판사의 부인인 게 알려진 후,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육군병원의 말단사무직을 얻으셨다. 새벽 일찍 일어나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사무실 창문을 활짝 열고 총채로 구석구석 전쟁과 외로움의 때를 털어 내시던 모습이 지금도 활동사진처럼 선하다. 어머니는 새벽 어스름 속에서도 여명을 보고 계셨던 게 분명했다. 젊은 어머니는 새벽 청소 때마다 머리에 하얀 스카프를 쓰고 ‘블루 헤븐’ 이란 경쾌한 음악을 유성기로 트셨는데,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달콤하고 시원한 새벽공기 내음이 난다.
미국에 오신 후에도 자식들의 생존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어린 손주들도 손수 키우셨다. 좀 쉬시라면 늘 얘기하신다. "사람이 떠날 때면 누구나 하는 말이 있다더라, 꼭 십 년만 더 살았으면, 그래서 내 하고 싶은 것 해 보았으면 한다더라. 내 소원은 손톱이 빠지도록 자식들 도와주는 기쁨에 사는 것이다."
18살 때 원산에서 홀홀단신 남하하신 어머니. 서울 유학시절에도 삼팔선이 막혀 홀로 기숙사에 남아 부모형제를 다시 뵙지 못하셨다. 남들이 부러워한 결혼 후에도 그 잘난 남편과 생이별해야했던 어머니께 피붙이는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이젠 명절이면 자식들과 여덟이나 되는 손주들로 집안이 그득하다. 어머닌 젊은 날의 활기가 되살아난 듯 머리에 하얀 스카프를 쓰고 식구들이 좋아하는 만두를 상 가득히 빚으신다.
요즘 어머니는 하루 서너 시간 씩 동양화를 그리시며 석음하신다. 원래 손끝이 여무신데다 열심히 획 긋기를 연습하시더니 삼 년만에 전시회를 가질 정도가 되셨다. 지금은 가족들을 위해 작품을 만들고 계신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시면서도 매일 꼼짝 않고 그리신다. 작품을 표구까지 해서 당신의 정표로 하나씩 나눠주실 계획이시다.
올해 6.25가 60 주년이다. 전쟁의 상흔과 이별의 아픔도 이젠 한 갑자(甲子)가 지났다. 육십 년만에 돌아와 환갑(還甲)이 되었다. 세상 모든 게 새로 시작하는 새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지난 60년간, 어머니의 뼈를 깎는 석음의 덕에 우리 자손들이 살아왔다. 내가 어찌 어머니 앞에서 소일을 찾겠는가. 우리 앞에 보람된 석음의 세월만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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