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발발 60주년, 하와이에는 한국전에 참전해 포로가 되어 생환된 참전용사들이 40여명이었다. 이 가운데에는 일본계가 다수를 이루었지만 한국계 포로도 5명으로 현재 20여명의 참전 포로들이 생존해 있다고 한다. 한국전참전 재향군인회 하와이지부 허균씨는 이들과 아직도 교류하며 한미동맹의 우의를 다지고 있다. 허씨를 비롯한 한국전참전용사들은 아직도 몸이 불편한 전우들을 서로를 돌보며 노병들의 전우애를 다지고 있다. 다음은 한국전 참전포로 가운데 당시 상황을 일기로 꼼꼼하게 기록해 보관하고 있는 스스무 시나가와(사진)의 기억을 허 균씨가 정리해 본보에 보내 온 내용이다.
<편집자주>
올해 81세의 스스무 시나가와는 한국전에 참전해 포로가 되어 모진 고통을 겪은 참전포로출신 재향군인이다. 포로가 되어 평양에까지 끌려가 고막이 터지고 팔다리가 부상당하는 고통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생존해 있지만 당시 상한 고막은 더 이상 치료를 하지 못하고 현재 청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로 지내고 있다.
시나가와는 1950년 7월2일 한국전 투입 당시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며 6월이면 당시의 고통으로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1929년 3월10일 카우아이 섬에서 일본계 2세로 태어난 시나가와는 1948년 와이메아 고교를 졸업하고 1949년 미 육군에 자원 입대했다. 하와이 스코필드 병영에서 훈련을 마치고 일본 사세보에 주둔중인 미24사단 34연대 제1대대에 배속되었다. 시나가와의 부대는 한국전쟁 발발 1주일만인 7월2일 부산항에 도착해 전장에 투입된 최초의 미군부대였다.
평택 북방 국도연변에 배치된 이 부대는 개인참호를 구축하고 적을 기다리던 중 커다란 폭발음가 함께 산모퉁이를 돌아 남진하는 탱크 3대를 발견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당시 미군은 탱크를 저지할만한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아 적의 전차들은 미군들을 지나쳐 남진을 계속할 정도였다는 것.
탱크를 앞세우고 적 보병들이 남진해 오자 시나가와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총격을 시작하며 본격 교전이 시작되었다. 난생 처음 실탄사격을 하며 본격 전쟁터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것도 잠시 포탄이 터지면 적군이 전진하는가 하더니 시나가와는 오른팔에 심한 요동을 느끼며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잠시 후 오른팔을 만져 보니 뒤로 제쳐져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스러져 뼈 조각들이 보였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정신없이 터지는 포탄속에서 시나가와는 왼손으로 오른팔을 잡아 당겨 원위치 시키고 임시변통으로 휴대하고 있던 붕대로 팔과 발의 상처부위를 동여 메고 싸웠지만 부대원들은 모두 포로가 되고 말았다.
수원에 도착해 양손이 묶인 채 시가행진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연도변 수원 시민들이 미군 포로들을 향해 조롱하며 침을 뱉기도 했다. 수원에서 사흘간 머문 뒤 군용트럭을 이용해 영등포로 이동해 다른 미군 포로들과 합류해 기차를 타고 다시 평양으로 이송되어 7월11일 평양에 도착했다. 그 과정에서 시나가와는 부상당한 팔과 다리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고통과 고열로 정신을 잃기도 했다.
평양의 찌는듯한 더위에 시나가와의 팔다리는 썩어 들어가며 급기야 구더기가 끌기 시작하며 최악의 상태로 치닫았다. 겨우 군의관의 치료를 받게 된 시나가와는 자신의 상처에서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구더기들이 자신의 고통을 덜어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군의관 왈, 구더기가 생살을 파먹기 보다는 고름부위를 제거해 주고 있어 좋은 징조라고 격려해 주더라는 것.
당시 마취제가 동이 나 맨 정신에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 당시 아픔은 기억에 생생해 아직도 몸서리치고 있다.
1950년 9월5일 시나가와 포로일행은 기차편으로 한국과 만주 국경에 위치한 만포진으로 이동, 9월11일 만포진 수용소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시나가와는 포로가 된 미 군의관의 환자이자 통역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웠지만 밤새 잠을 못자게 고문을 한 이(Lice)를 잊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기생충 회충이 목을 넘어오느 등 포로들은 비위생적인 환경에 영양실조까지 겹쳐 포로생활의 비참함을 더했다.
포로들은 10월19일 중강진 수용소로 이송되고 1951년 10월 다시 창성 수용소로 이송되어 중공군 관할로 이관되기까지 750여명의 포로는 268명으로 줄었다. 시나가와는 포로생활 33개월간 팔의 붕대는 풀지 못한 체 지낼 수 밖에 없었다.
1953년 4월 그들은 벽동 수용소에서 다른 부상포로 80여명과 합류하여 군용트럭에 분승해 평양을 거쳐 개성에 도착한 후 이틀간 머물고 다시 트럭을 타고 판문점으로 향했다. 판문점에서 차에서 내린 포로 일행은 도보로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남쪽 하늘에 펄럭이는 성조기를 보았다.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이젠 살았다’는 감격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33개월간의 포로생활이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1953년 5월1일 부상 포로 일행은 대형수송기 편으로 하와이를 향해 출발했다. 시나가와는 상공에서 고향 카우아이를 바라보며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히캄 공군기지에 도착해 비행기 문이 열리고 환영객 맨 앞줄에 선 어머니를 본 순간 눈물범벅이 되어 달려가 껴안고 아무말도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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