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세도나에서 돌아오자 붉은 적벽(赤壁)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햇빛이 오렌지색 불꽃처럼 돌산의 벽을 어루만지며 타오르는 그 광경을 오래 기억하고 싶은 듯했다. 세도나를 병풍처럼 둘러싼 적벽들은 그 웅장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군림하지 않았다.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 마을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 불그레함은 모닥불처럼 따뜻했다.
"김형, 세도나로 갑시다. 자연의 기가 흐른다는 붉은 돌산에 서서 마음 한번 씻고 옵시다." 20년 지기 C형 부부는 이민생활동안 거의 쉴새없이 일해온 터였다. 손 타는 가업(家業)을 부부가 일주닷새 꼬박 꾸려오면서 가족보험 때문에 그는 또 파트타임을 뛰었다. 부지런한 성격 덕에 이젠 좀 안정이 되었지만 아직도 일을 놓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때 떠납시다. 여행 만한 보약이 어디 있겠소". 이민일세들의 업보가 일복이라고 서로 위로하면서 행장을 꾸렸다.
세도나는 북 애리조나 사막의 일부라고 했다. 그러나 4,500피트 고원지방의 온화한 기후 속에 유독 맑은 하늘, 손 때타지 않은 삼림과 형형색색의 지형이 빚어내는 조화 때문에 소문대로 신비감 넘치는 곳이었다. 근처의 그랜드 캐년처럼 위압적이지 않고, 소노란 사막처럼 황량하지 않고, 콜로라도 산정처럼 고독하지 않았다.
레드 락 공원에 들어섰다. 중앙에 가장 높은 돔 같은 캐피탈 뷰트(Butte)가 보인다. 그 좌우로 굴뚝 바위, 도마뱀 머리, 설탕더미, 커피 팟 바위 등, 제 이름대로 생긴 돌산과 언덕들이 반기듯 서있다. 문득 머리 위에서 솔개의 울음소리가 절벽을 타고 메아리친다. 그제야 그 동안 내가 잊고 살았던 게 상상력임을 깨닫는다. 상상력은 자연과의 교감의 비밀통로가 아닌가.
비로소 낙타머리, 거인의 엄지, 쌍둥이 바위, 성당 돌산도 보인다. 종 탑과 스누피가 누운 모습도 훤히 보인다. "세도나엔 볼텍스(vortex) 에너지라는 신비한 힘이 있는데요, 강한 기운이 회오리처럼 용솟음 치는 몸의 혈과 같은 곳이래요. 지구 내에 21군데 볼텍스 혈이 있는데 이곳에 4군데나 있답니다." 곁에 선 여행자가 친절히 설명해 준다.
볼텍스가 전자장(電磁場)이라면 세도나 흙에 포함된 철분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사실 세도나가 붉은 빛을 띄는 것도 옛날 바다였던 이곳 사암 속에 포함된 철분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 특유의 강렬한 적색이 산화된 철분, 즉 쇠의 녹이 시간이 갈수록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득 사람도 나이 들수록 잘 익은 성품이 드러나는 게 순리란 생각이 든다.
근 900년 전의 인디안 유적지, 몬테주마 캐슬을 찾았다. 절벽 안에 만들어진 5층 공동주택지다. 앞에 흐르는 강물로 농사를 지은 흔적이 있다. 옥수수, 호박, 목화 등을 키웠다고 한다. 40여 개 되는 방마다 도토리 빻던 돌 접시 절구들이 놓여있다. 사다리로 연결된 옥상엔 외적과 맹수를 망보는 망대도 있었다. 그들의 삶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민생활보다 더 고달팠을까? 그러나 그들도 세도나의 적벽을 바라보는 순간들은 행복했으리라.
"김형, 옛날 어리고 미련했던 이민 초기, 일이 절망적이면, 절벽 끝에 서서 그냥 눈 딱 감고 걸어갔으면 하던 때도 있었지요. 이제 세도나의 햇빛비치는 붉은 절벽은 내게 위로를 줍니다. 감사기도가 나옵니다. 자연과의 교감이 오랜만이요." 어찌 C형과 나만의 고백이랴. 이민일세들이 함께 걸어온 길이 아닌가.
아내는 일주일만에 그림을 완성했다. 화폭에 담긴 세도나의 적벽은 석양이 아닌 새벽 여명의 빛이 희망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 밝아오는 하늘을 향해 모처럼 마음의 혈을 활짝 열게 해준 C형 부부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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