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이어 종군기자로 활약한 VA 임성환씨
전쟁과 역사의 현장에는 늘 기자(記者)들이 있다. 글과 사진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종군기자들이다. 버지니아의 임성환씨(60, 애난데일.사진)는 한국전에서 종군했던 아버지에 이어 베트남전을 필름으로 남긴 종군 카메라 기자였다. 그의 아버지 고 임인식(林寅植) 씨는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으로 한국전의 참상을 기록했다. 부자(父子) 2대가 전장을 누빈 것이다. 그것도 한국전과 베트남전이란 현대사의 굵직한 두 전쟁의 실체를 필름으로 남겼다.
임성환씨가 월남전에 무비 카메라를 메고 뛰어든 건 1972년 4월경. 전쟁이 막바지에 치달을 때였다. 군에 입대해 국방부의 국립영화제작소의 국방뉴스 기자로 있다 파병됐다. 사이공의 주월 한국군 사령부의 보도실에 소속된 그는 1년간 정글을 누비며 한국군의 활동상을 16밀리와 35밀리 무비 카메라에 담았다. 계급장 없는 군복에 가슴에는 ‘국방뉴스’란 명찰을 달고서였다.
“현역 군인이었지만 원활한 취재를 위해서 민간인 종군기자 신분으로 활동했습니다. 장군과 장교들도 제가 사병인 줄 몰랐습니다.”
주월 사령부 보도실에는 현역 중령을 실장으로 모두 4명이 베트남전을 글과 영상으로 취재했다. 1970년대 초반 대한뉴스에서 단골 메뉴였던 월남전 정글을 누비는 용맹한 따이한 대부분이 그의 작품이었다. 보도실의 작품들은 국방뉴스와 함께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에 소개되는 대한뉴스에 보도됐다. 당시 KBS TV 특파원들이 철수한 관계로 임씨가 찍은 월남전 소식들이 KBS를 통해 전국에 방영되기도 했다 한다.
전장을 누비면서 임씨는 죽을 고비도 숱하게 넘겼다. 포탄과 함께 보이지 않는 적인 폭풍지뢰, 부비트랩이 그와 병사들의 목숨을 위협했다.
“군인들과 함께 작전지역에 투입되면 3일분의 C 레이션과 무비 카메라를 갖고 같이 다닙니다. 참호를 파고 생활하다 전투가 벌어지면 찍고 그랬지요. 몇 번이나 죽다 살아왔습니다.”
작전에 투입됐다 목격한 가슴 아린 장면도 있었다. 그 유명한 안케 전투가 끝나고 한 군인의 상의 군복에서 총알구멍이 난 수첩을 발견했다.
“그 병사는 어제까지 그 수첩에다 일기를 썼습니다. 아, 목이 마르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그런 절절한 내용을 읽다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1년의 종군생활을 끝낸 임성환씨는 귀국 후 국방뉴스에 잠시 있다 제대했다. 그 후 개인 비즈니스를 했으며 1994년 도미했다.
아버지는 아들보다 20년 먼저 한국전에 종군했다. 그의 부친인 임인식 씨는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역사의 1세대를 대표하는 작가였다.
육군사관학교 8기생이었던 그는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육군 대위)으로 52년까지 전쟁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불타버린 중앙청 등 우리의 눈에 익은 전쟁 사진 대다수가 그의 아버지의 작품이다. 임인식씨는 87년 워싱턴 지역으로 이민 왔다 98년 한국에서 타계했다.
임인식씨의 둘째 아들인 임성환 씨는 “종군기자는 역사의 증거를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의 존재”라며 “아버지와 나는 숙명적으로 대를 이어가며 카메라를 통해 전쟁의 흉측한 모습과 사실을 담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종국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