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계절답지 않게 제법 센 바람을 동반하고 비가 내려서일까. 유난히 많은 나뭇잎이 땅에 내려 앉아, 엮어놓은 천연색의 카펫, 사방으로 넓게 펼쳐져 있으니 바라보는 나는 피크닉을 나온 기분이다. 외출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서 있는데 동창(東窓)으로 새떼가 날아간다. 무슨 새 인가 고개를 돌려 보니 새떼가 아니라 가을의 서곡인 듯 고엽이 윤무를 하면서 집안으로 들어오겠다고 한다.
요즘 왔다 갔다 하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보다 빨리 느끼고 보면서 몸이 따르지 않아 수은주의 강하를 깜박 잊게 된다. 그런 날 날이 밝아서 햇볕 따뜻한 뜰에 나와 보면 간밤의 추위에 파릇파릇하고 싱싱하던 여름잎들은 갈색으로 오그라들었고 여린 열매는 가벼운 동상(凍傷)을 입고 만다. 물론 내가 아끼는 조롱박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들고 오던 가방 팽개치고 남편과 함께, 표주박을 매달고 있는 격자 울타리를 들게 하고 나는 뿌리가 뽑히지 않게 화분을 들고 이인삼각(二人三脚) 형식으로 살금살금 손상 하나 없이 집안으로 들여 놓았다. 아 이 풍요로움! 가을이 서슴없이 집안으로 들어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설치 작품을 어디에다 전시해야 할까. 사방에서 잘 보이고 사람의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고 가능하면 수시로 내가 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나의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저쪽 방과의 사이에 포물선을 그리며 연결돼 있는 난간 끝에 격자를 세워 놓고 보니 참 잘 어울린다.
아래층 거실에서 올려다 볼 수 있고, 한겨울 파이어 플레이스에 모닥불이 피워질 때면 더욱 가을의 운치가 돋보일 것이 아닌가. 이만하면 월동(越冬)준비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조금 거리를 두고 다시 보니 시들어 있는 잎은 줄기에 붙어 있으니 그런 대로 봐줄 수 있겠고, 그러나 갈색으로 변색되어 굳어 있는 줄기가 눈의 가시다. 서슴없이 앞 정원으로 달려 나가 싱싱하게 뻗어 나가고 있는 고구마 줄기를 기다랗게 몇 줄기 잘라 들여와서 목이 긴 유리병에 꽂아서 표주박 가지마다 감싸 주었다. 동양 중에서도 특히 한국의 미는 공간 여백의 예술인데 백색 울타리의 공간은 너무 많다. 황금분할법칙(黃金分割法則)에도 맞지 않다. 그러나 이제 녹색 잎으로 공간을 적당히 보충시켰다.
한밤중 어설프게 잠이 깨었을 때 베이 윈도우(Bay Window)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어스름하게 내비치는 울타리에 달려 있는 나의 표주박, 금년 가을의 수확이 참으로 마음 따뜻하게 해준다. 이제 계절이 바뀌려하고 있다. 가을이 더 짙어지고 초겨울에 첫눈이라도 내리는 밤을 기다렸다. 손자 생일 때 사다 놓고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한쪽 벽 구석에 세워 놓았던 쉬폰 옷감으로 만들어진 꽈리나무를 모방한 꼬마전등에 점화를 할 것이다. 표주박이 달린 울타리 밑에다. 너무 밝지 않아서 한밤중에 어슬렁거리기에 알맞은, 바다의 등대 같은 안내등(案內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외출하기 위해 뚜껑을 연 파운데이션(여자 기초 화장품의 한 종류) 신나게 흔들다가 손끝에서 놓치고 말았다. 멀리 날아가서 커다랗게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더니 제법 커다란 아이보리 톤의 초현대식 설치 미술작품을 순식간에 바닥에 그려 놓았다. 쏟아진 파운데이션 아까워서 덕지덕지 얼굴에 발라 짙어진 화장, 사시장춘(四時長春)이 씌어 있는 장방형의 화분에 심어진 단풍분재가 집안 계단 밑에서 올려다보며 웃고 있다.
오늘은 목요일. 집 밖에서 갑자기 잔디 깎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들창을 통해 보니 손자를 앞에 태우고 잔디를 깎고 있는 큰 아들이 보인다.
아들아 낙엽은 가을의 풍류(風流)인 것을, 그냥 두어라. 그 아름다운 오색의 낙엽 그냥 두어라.
임경전
은퇴의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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