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가면 오랜만에 만날 사람도 많고 먹고 싶은 것이 많다. 마침 여름이라 일요일 점심에 오빠네 식구를 오장동 냉면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친정은 이북사람들이라 다들 냉면을 좋아한다. 냉면에는 남편과 첫 데이트의 추억이 있다.
주말의 한 여름 점심 무렵 명동성당 앞에서 만난 남자는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으로 잔뜩 멋을 내고 있었다. 점심으로 무얼 먹겠느냐고 하는데 날씨도 덥고 하니 당시 내가 몇 차례 가본 냉면집이 있으니 그리 가자고 했다. 함흥냉면집으로 가서 비빔냉면을 시켰다. 나는 평소처럼 겨자도 넣고 다대기도 더 넣었다. 뜨거운 육수를 아 시원하다며, 천천히 냉면의 매운 맛을 음미하다, 맛이 어떠냐고 바라보니 이 남자 땀을 뻘뻘 흘리며 허겁지겁 먹고 있는 것 아닌가. 하얀 와이셔츠 깃이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아차 내가 실수를 했구나!
결혼 뒤 남편은 그 당시 유난히 하얀 얼굴에다 콧등에 땀 한 방울 맺히지 않고 그 매운 냉면을 즐기는 나를 보고 속으로 “이 여자 혹시 아주 독한 여자 아닐까” 생각했다 한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는 곧잘 물냉면이 아닌 회냉면을 시킨다. 매운 걸 한 입만 먹어도 바로 땀을 비오 듯 흘리면서. 딸아이는 날 닮아서 인지 매운 음식을 나보다 더 잘 먹는 것 같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부인과 딸을 위해 한국 출장 길에 아주 매운 유정낙지를 냉동 포장해 사다 주기도 한다. 감동이다.
친정에서는 온 식구가 둘러 앉아 함께 만두를 빚어 종종 식사를 대신 하곤 했다. 그런 날은 마치 잔칫날처럼 들뜨고 즐거웠다. 결혼 후 사촌오빠 집으로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곱게 찐 만두로 한 상 가득 차려 내놓으셨다. 경상도 사람인 남편은 만두로 만찬을 대신 한다는 건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두어 점 집더니 젓가락을 튁 던지듯 내려 놓는 게 아닌가. 마치 시위라도 하듯. “백년손님 사위가 처가에 오면 씨암닭을 잡아 준다는데…” 혹시나 하여 닭찜으로 따로 밥상을 차려 놓은 언니의 배려로 무마되었으나 성깔이 보통 아니라고 두고두고 회자되곤 한다.
결혼 한지 어언 30년이 되어 가다 보니 음식뿐 아니라 많은 부분 서로 닮아 가며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 같다. 세월이 빚은 음식 궁합으로부터 부부의 궁합이 맞추어 가는 건 아닐까 한편 생각해 본다.
(의료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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