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옥
하와이 한인문인협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딘가로 자꾸 내달리고 싶어져서
마음을 꼭꼭 여미고 내꿎은 커피만 마셔대느라
가벼운 두통에 눈까지 뻑뻑해지고 있습니다.
치르륵거리며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소리를 따라가다
좁다란 내 가슴에도 작은 골목길 같은 길 하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도 찾아 오지 않아 그만 길도 아닌 길이 되어버린 그 길이
가는 비에 씻겨 말갛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따라 이쁜 종이배를 띄우 듯
가시덤불 우거진 길을 슬쩍 들여다 봅니다.
곳곳에 음모처럼 도사리고 있는 세상의 함정들을
이미 다 눈치채고 있는 중늙은이처럼
아직 거기 무언가 찌꺼기 같은 것이라도 남아
덤덤해진 내 가슴을 울릴만한 현 하나 조우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예쁜것도 시간이 지나면 남루해지고 추해지듯
아름다움도 때가 끼고 녹이 슬면 아름다운 것이 아니 듯
사랑도 그렇겠습니다 그리움 또한 그렇겠습니다
오랫동안 쓰다듬고 안아 왔던 그것들이
이제는 닳고 닳아 만지면 형체조차 사라지고마는 먼지 같은 존재로
꼭꼭 기억의 창고에만 숨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둑신하게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슬픔처럼 없어졌던 길은 다시 슬픔처럼 되 살아나곤 하는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이젠 어떤 들끓음도 먹먹해지는 가슴도 조금씩 익숙해져서
참을만하게 되어졌다는 것인데
보고 싶음에 가슴이 욱신거렸던 날의 고백이 농담처럼
삭게 될까봐 흠칫흠칫 놀라면서도 ‘아! 이렇게도 살아지는구나’ 합니다
가끔씩 토끼풀꽃이 하얗게 핀 풀밭에 앉아 동그란 꽃반지를
만들어 끼고 있으면 “그래도 살아 있어 행복한거야”하며 픽 웃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다 돌아올 때 느껴지는 감정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일 것입니다 가벼워졌다고 느껴지는 그 기분
그래서 마음이 깃털같이 가볍게 느껴지는 그 기분
눈에 비쳐지는 모든 것들이 애잔하고 눈물겨워져서
어떤 것에도 다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어지는 그 멜랑꼴리…
한 2년전 왼쪽 가슴에 동전만한 몽우리가 생기면서 아프기 시작하여
병원엘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내가 암에 걸려 죽게 되는구나 항암치료 하자고 하면
그냥 버티다 죽어야지” 뭐 이런 생각들을 참 겁도없이 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생명들은 다 죽게 마련인데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사실 죽음이란 아직 내게는 공포입니다
그저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것 뿐이라는 말로는 전혀
위안이 될 수 없는 절대 공포로 나를 포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공포라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자니
공포의 근원이 다름 아닌 이별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것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롯하여
꽃 나무 바다 돌 하다못해 바퀴벌레까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절연의 상태가 죽음이라는 것이기에
그토록 커다란 공포로 압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의 축복은 이렇게 불편한 것들도
서로 마주하고 보듬을 수 있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미움이나 증오도 또 다른 얼굴의 사랑이라는 말이 진리처럼 들리는 것도
우리가 그렇게 살아 왔기 때문에 그 말을 거부하고 싶으면서도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길은 아득하면서도 멀었습니다
분노의 길 슬픔의 길 이상의 길이 제 각각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한 쪽으로 모아져 내 뒤를 무겁고 질기게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오늘 밤에 듣는 저 가느다란 빗 소리는
살아 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자연의 충고로 조금씩 세상과의
화해를 위한 부끄러운 손 하나 내밀게 합니다
난 다시 길이 아닌 길 위에 서서 10년 뒤의 이 길을 그려 봅니다
분노의 길이 사랑의 길이 되기를
그리고
화해의 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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