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이하여 추모기념 집회에 참석해 오랜 만에 엄숙하고 경건한 시간을 가졌다.
주최 측에서 세밀하게 준비한 자료와 추모사와 김대중 도서관에서 보내온 추모 영상을 보면서 그 분의 일생을 회고하게 되었다.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워싱턴에서 목회하던 1982년 몹시도 춥던 12월에 정치 망명을 오셔서 워싱턴에 2년여를 계실 때였다.
사실은 그 보다 훨씬 오래 전인 1971년 경기도 문산에서 만나 뵌 적이 있기도 하다. 다름이 아니라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유세차 오셨을 때였다. 참으로 인기가 대단했다. 그래서 군목으로 그 지역에 복무하던 나도 유세장에 갔었다. 열정적이고 감동적이며 멋진 제스추어에다 직설적으로 쉬지 않고 두려움 없이 퍼부어 대는 불을 토하는 연설은 모든 국민을 감동 시켰다. 그리고 대선 승리를 기약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부대에 출근 하였더니 부대 모 요원이 “군목님, 그런데 가시면 곤란합니다” 하며 반 공갈 섞인 말을 하던 씁쓸한 생각이 난다.
김대중, 그 분은 대중의 인기가 너무 컸기에 오히려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 가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차례 국회의원 낙선 후 1961년 5월 14일에 치러진 재보선 선거로 국회의원이 되어 금배지를 달지만 이틀 뒤에 일어난 5.16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의원 선서도 해보지 못했다. 그 후 1963년 고향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지만 그때부터 험난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드디어는 1973년 일본에서 정보부에 납치되어 바다에 버려질 뻔 하다가 기적으로 살아나고 12.12 신군부 쿠데타 시절에는 군사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나 감형되어 목숨을 건져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만큼 죽음의 고비를 많이 넘긴 정치인은 찾아볼 수 없다고들 한다. 그리고 드디어 4수 끝에 대통령이 되어 햇볕정책을 펴고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던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국인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된다. 어찌 보면 그의 일생 자체가 드라마틱한 한편의 영화 같다.
그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려 있는 것은 지난 반백년 한국이 관통해온 소용돌이가 그만큼 격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던 독재의 서슬 앞에서 목숨 내 놓고 입을 열었고 그래서 독재로 치닫던 역사의 수레 바퀴를 민주화로 돌리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겠다. 민주, 인권, 정의, 평화, 사랑과 화해를 위해 행동했던 양심으로 치열하게 살아온 86년간의 생애는 정말 긴 고난과 짧은 영광이었다.
그분은 2009년 8월 18일 80이 훨씬 넘은 아내가 병상을 지키며 직접 뜨개질 한 아이보리색 장갑과 덧신을 신고 역사 속으로 떠났다. 어록을 보면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평화가 무지개처럼 피어나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라면서 2000년 6월 13일 평양 방문에 앞서 국민에게 “민족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과 현실을 직시하는 차분한 머리를 갖고 (평양) 방문길에 오르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분의 서거에 이명박 대통령은 “큰 정치 지도자를 잃었다”고 하면서 깊은 애도를 표시하고 “민주화와 민족화해를 향한 열정과 업적은 국민들에게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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