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대 최영호 역사학 교수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이들은 신의를 저버린 미군당국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에 맞섰지만 결국 호노울리울리 수용소로 보내졌고 이 곳의 한국인 포로들이 곧잘 규율을 지키지 않고 방만한 생활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들의 자립심과 민주주의의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계몽운동을 벌여 ‘자유 한인보’라는 정기간행물을 발행해 수용소 안으로 들어오는 몇 안 되는 영문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현지 신문의 기사들을 번역해 게재하고 또한 한국의 역사와 문화, 이승만 박사의 활동들에 대한 기사 등을 실음으로써 격리된 생활에 익숙한 한국인 포로들에게 바깥 세상의 정세를 알려주기도 했다.
이들은 매주 1,350여부의 간행물을 발행해(한국인 포로 2명당 1부에 해당) 배부했으나 포로의 대다수가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 노무자들이어서 결국 읽혀지지 않은 채 쓰레기통에서 발견되는 것을 보고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한다.
수용소 내에서 한인들은 각자 출신지에 따라 향우회 등을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으나 박씨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 같은 움직임은 서로간의 비방이나 험담의 구실만이 될 뿐 전체 한인들의 화합에 도움이 전혀 되질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인 포로들은 한편 수용소에서 지급되는 딸기잼에 이스트를 넣어둘 경우 하룻밤 만에 술로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막걸리’라고 부르며 마시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흥미를 더한다.
박순동, 이종실, 박형무 3인방이 1945년 12월15일자로 호노울리울리 포로수용소에서 마지막으로 발행한 ‘자유 한인보’ 제7호에는 당시 한국인 포로 전원의 명단이 실렸는데 이중 같은 해 4월6일 남해안에서 작전 중이던 미 해군 잠수함 USS Tirante가 삼천포 앞바다에서 나포한 3명의 한국인 어부 김덕윤, 김기찬, 최금봉 등의 사연이 눈길을 끈다.
당시 문제의 잠수함은 인근 해역에서 조업 중이던 여러 어선에 발포해 이중 가장 큰 선박을 침몰시키고 3명의 어부를 진주만으로 납치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해안가 지리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했던 해군 당국은 이중 단 1명만이 부산까지 항해 해 본 경험이 있고 나머지는 삼천포를 떠나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심지어 당시 해군 정보장교 신분으로 진주만에서 전쟁포로들을 취조했던 훗날의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G. 언더우드도 “남해안 삼천포에서 끌려온 3명의 어부들을 본 기억이 난다. 아침에 평화롭게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봉변을 당해 진주만까지 잡혀왔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라며 회고하기도 했다는 것.
최 교수는 미국의 이 같은 행위는 일본에 보낼 간첩을 양성하기 위해 일본인들을 납치해 왔던 북한의 만행과 다를 게 없다고 지적하고 지금이라도 미 해군 및 행정당국은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상해야 할 것이라고 이번 논문을 통해 밝히고 있다. 또한 최근 일본문화회관 측에서는 잡초가 무성한 호노울리울리 수용소 인근을 정리하고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행해졌던 미국 정부의 부당한 행위를 알리고자 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이 곳에 억류됐던 2,700여명의 무고한 한국인 포로들도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끝>
<사진설명: 2차대전 당시 호노울리울리 수용소의 모습. <사진제공 하와이 플랜테이션 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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