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셋째 주, 제가 사는 워싱턴 주는 48년 만에 찾아 온 한파를 동반한 눈폭풍으로 한 주 내내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휴일이었던 월요일부터 심상치 않던 날씨가 계속 영하에 머무르면서 내리던 비가 눈으로 바뀌더니 그 눈이 쌓이고 얼고를 반복하면서 어느덧 30센티미터가 넘는 적설량을 기록했습니다.
비탈길이 유독 많은 데다 주·시정부가 늑장대응을 하는 바람에 많은 도로가 통제되었습니다. 게다가 쌓인 채 얼음으로 바뀐 눈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넘어지면서 주변의 전선을 덮쳐 정전사태까지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습니다.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아이들 학교를 시작으로 모든 직장들이 차례로 문을 닫았고, 그 바람에 아이들에게는 임시 방학, 어른들에게는 임시 휴가가 예기치 않게 주어졌습니다.
우리 가족은 화·수요일은 단지 폭설로 인한 도로사정이 주문제였기에 눈사람 만들기와 눈싸움을 즐기기도 했지만, 목요일 아침 전기가 나가면서부터는 모든 얘기가 달라졌습니다.
밥도 해먹지 못해 고픈 배를 부여안고 담요로 몸을 칭칭 감은 채 난방이 안 되는 싸늘한 거실에 모여 앉은 꼴을 보니 정말 예전의 보릿고개가 따로 없는 형상이라 실소가 절로 나왔습니다. 결국 난국 해결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가장의 위치를 가진 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빙판에 가까운 눈길 위로 기다시피 차를 몰아 가까운 마트에 가서는 벽난로용 장작과 휴대용 개스레인지 연료, 양초 등의 물품을 사들고 귀가하니 가족들의 환대가 장원급제 하고 금의환향한 박 도령에 비할 바 아니었습니다.
벽난로로 온기를 확보하고 가스레인지에 지은 냄비 밥을 따스한 국물과 함께 뚝딱 해치우고 나니 살 것 같았습니다.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사방이 어둑해지면서 곳곳에 양초로 불을 밝히고 이불이란 이불은 모두 꺼내 벽난로 앞에 깔고 4식구가 모두 그 안에 들어가 앉아 각자의 추억을 두런두런 나누다 보니, 마치 산장에 캠핑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딸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헤벌쭉거리며 “아빠! 이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오래 붙어있어 본 적이 최근에 별로 없었잖아. 밥만 먹으면 모두 자기 방에 틀어 박혀 대화가 단절되었는데 오늘 그동안 못 나눈 얘기 다 나눌 것 같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전 첫날은 운치있게 지나갔습니다. 다음 날 전기는 들어올 줄 모르고 자동차의 라디오를 통해 들은 소식은 거의 주변의 10만여 가구가 정전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복구에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뉴스에 놀라 장기 대책을 위해 나선 마트행이 한 발 늦어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전기가 복구된 토요일 저녁까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위 속 불편함으로 인해 정말 전기의 소중함을 절감하며 이틀을 보냈습니다.
토요일 오후, 먹을 것이 마땅치가 않아 가족들과 빙판에 가까운 눈길을 헤치고 가서 문을 연 식당을 찾아 몸을 녹이고 배를 채운 뒤 혹시나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동네 초입 가로등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습니다.
돌아 온 전기는 집을 다시 비췄고 온기를 가져다주었고,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려주었습니다. 다음 날 주일 아침, 며칠만에 새우잠에서 벗어난 상쾌함으로 눈을 뜬 나에게 어려움 속에서도 불평없이 잘 따라주던 집사람이 불쑥한다는 말했습니다.
“혜리 아빠! 이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 라는 성경구절을 시대에 맞게 좀 고쳐야 할 것 같아. ‘세상에 빛과 소금 그리고 전기가 되라’고 말이야.” 지난 며칠 간, 마누라도 되게 힘들었나봅니다. 하하하하.
박 준 서 <월드비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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