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토박이 한인 3세 낸시 김 할머니
"저는 한국에서 온 이민 1세 아버지와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 어머니 사이에서 1937년 시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시카고 한인 이민역사가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 그 이전부터 상당수의 한인들이 시카고 일원에 살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이민이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 같은 1907년 미국 땅을 밟은 청년 박영찬(낸시 김의 외할아버지/1887~1964)은 큰 꿈을 안고 한국을 떠나 중국땅에 닿은 뒤 연이어 캘리포니아에 정착해 중국인들의 틈에 섞여 대륙철도 공사 현장에서 청춘을 바치게 된다. 그리고 몇년 뒤 박기아(1895~1961)를 만나 결혼하고 1915년 오레건주에서 딸 헬렌을 낳았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가 된 헬렌(1915~1996)은 21살이 되던 1935년 일제치하의 한국을 떠나 샌프란시스코 땅을 밟은 한국인 청년 김이택(1900~1981)과 약혼한 뒤, 곧바로 시카고에 정착해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1937년 이들의 딸 낸시 김이 태어난다. 부계로는 2세지만 모계로는 한인 3세인 낸시 김 할머니의 탄생 및 가족사의 큰 줄기다.
차세대 한인들을 언급하며 한인 1.5~2세, 한인 2~3세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한인 3세의 경우, 타지역에 비해 이민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시카고지역에서는 결코 흔치 않다. 낸시 김은 미국에서 태어난 2세 한인 어머니에서 태어난 한인 3세로 75년 평생을 시카고에서 살았다. 중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외동딸인 제니퍼도 엄연한 한국계인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시카고에서 살아가는 한국계 4세대 가족인 셈이다.
1937년 태어나 시카고시내 브로드웨이와 디반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가정집에서 성장한 낸시 김은 아직도 어릴 적 추억이 가득하다. 당시에는 한국학교나 한국어를 배울만한 곳이 없어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지만 부모님과 함께 했던 유년시절의 향기는 그를 여전히 감싸고 있다. 밥때가 되면 큰 소리로 ‘진지 잡수세요’하고 외쳤던 어릴 적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래서일까 낸시 김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한국말이 ‘진지 잡수세요’다. 그는 "아버지께서는 무척 가부장적이셨다.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내게 여자는 시집만 잘가면 된다며 시집가기를 종용했을 정도"라면서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어머니는 누구나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나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셨다. 그 덕에 대학에 진학해 졸업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낸시 김은 업타운 인근에 위치한 샌고등학교를 마치고 1955년 일리노이대(어바나-샴페인)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그를 계속해서 이끌었고, 어릴 적 본의 아니게 여러 차별을 겪으며 자란 터라 타인을 위한 삶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회복지사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 그렇게 대학을 졸업한 김씨는 시카고시 복지과에서 22년간 사회복지사로 일한다. 시카고시가 지원하는 저소득층 지원프로그램과 복지프로그램을 수행하는 사회복지사로 흑인커뮤니티를 오가며 열심히 일했다. 일을 하며 중국계 2세인 남편 해리 진씨를 만나 1965년 결혼하고 이듬해 딸 제니퍼를 낳았다. 하지만 성격이 안 맞았던 탓에 진씨와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니퍼를 낳고 그 다음해에 남편과 이혼하고 딸과 함께 성을 진에서 원래의 성인 김으로 바꿨다. 낸시 김은 1991년 공무원 생활을 은퇴하고 링컨팍 동물원에서 자원봉사자로 20년간 일하는 등 평생을 시카고를 떠나지 않았다. 지금은 여느 연장자들처럼 집에서 소일거리하며 손자를 돌보고, 사위와 딸, 손자를 위한 저녁 준비를 하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러나 낸시 김에게도 어려웠던 과거가 존재한다. 흑인 등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40년대 중후반에 시카고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그는 그 당시 백인들의 차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특히 일본에 의해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한 시점이라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는데, 일본인과 같은 동양인의 출현이 그들에게는 반가웠을 리 만무했다. 가족들이 모두 단란하게 외식을 위해 레스토랑을 찾았다가 문전박대 당하거나 주문을 받지 않아 음식을 먹지 못하고 되돌아 온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또한 교내에서는 걸스카우트 활동을 했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고, 수영장에서는 입장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낸시 김은 아버지로부터 인종차별이 점차 없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었고, 자신 스스로도 피부색과 관련해 타인을 무시하거나 멸시해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 이런 부모님의 영향으로 낸시 김은 자신의 딸에게도 인종차별은 물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필리핀 남편과 결혼해 아들을 둔 낸시 김의 딸 제니퍼는 UIC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낸시 김의 아버지 김이택씨는 한인사회와 인연이 깊다. 초기 한인타운이 번영했던 클락과 브로드웨이길에서 소매점을 열고 장사를 하기도 했으며, 1975년 창립된 시카고 한미상록회의 원년 회원이자 별세 직전인 1980~81년까지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한국문화를 누구보다 사랑했고 한인들이 시카고 사회에서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살기를 바랐던 듬직한 한국인 이민자라고 낸시 김은 아버지를 기억했다. "아버지는 배추를 사다가 김치를 담가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에 넣어 이를 집 뒤뜰 땅을 파 묻곤 했다.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한국 고유의 김장문화와 김치 보관방법에 대해 이해하고 나서부터는 뼛속까지 한국인으로 살고자 했던 아버지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낸시 김은 오래전 어머니께서 해주시던 한국음식의 감칠맛과 매운 맛에 혀를 내둘렀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요즘도 딸을 위해 콩나물국을 끓이고 손자를 위해 불고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한국말을 못한다 뿐이지 한국인의 맛과 전통이 서린 DNA는 여전히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국요리라고 해봐야 만들기 쉬운 콩나물국, 불고기, 잡채 정도 밖에 하지 못한다. 더 많은 한식을 만들고 싶다.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배워보고 싶다"면서 "한국음식을 즐기러 여러 한식당을 찾는다. 갈비는 물론 불고기와 비빔밥은 언제 먹어도 너무나 맛있는 음식"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한인 3세로서 차세대 한인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낸시 김은 “한인이라는 자신 스스로의 정체성을 늘 기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지사회와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문화를 함께 공유하면서 미국사회에서 살아간다면 그 만큼의 경쟁력이 더 생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우리는 누가 뭐래도 겉모습만은 너무나 확연한 한국인이다. 그것을 숨기려거나 거부하려 해서는 안된다”면서 “가족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여러가지 자료들을 꼭 보관해 후세들에게 물려주는 것 역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100년 전부터 시작된 한인들의 이민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김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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