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감성적인 글을 잘 쓰던 연유로 사람들은 ‘내게 소설가가 되면 좋겠다’는 말을 종종 했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글을 쓰는 일들이 점차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기록하지 않는 순간은 사라진다’라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취미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고통으로 변해갔다.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감동을 주는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주객전도된 고민은 나 자신을 내가 쓰는 떨떠름하고 작위적인 이야기 속에 가두어 버렸다. 스스로가 즐기지 못했기에 글을 읽는 사람들 또한 내 고유의 색깔을 잃어버린 글 속에서 식상함을 보기 시작했다. 또한 나는 글을 잘 쓴다는 교만함이 있었기에 정작 글 속에서 성장하지 못했다. 그 당시 나는 글 속에서 길을 잃었던 것 같다. 그래서 글쓰기를 멈췄다.
그러던 내가 다시 글을 쓰고 싶다,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할머니께서 보내주신 편지 한 통 덕분이었다. 할머니께서는 형편이 녹록치 않은 소작농의 장녀로 태어나셨다. 소학교에서 글을 깨치셨지만, 할머니가 13살이 되던 해에 일어난 전쟁과 그 전쟁의 상흔으로 인해 주어진 ‘가장’이라는 역할로 인해 공부에 대한 열망을 접으실 수 밖에 없었고, 나는 할머니가 글을 쓰시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작년 봄학기를 휴학하면서 내게는 가족과 함께하는 6개월의 여유가 생겼었다. 그때 할머니께서 나와 함께 공부를 시작하셨다. 할머니가 학문에 임하는 자세는 무척이나 진지하여, 때로는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할머니께서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시는지 몰랐다. 다만 늘 동생들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미뤘어야만 했던 공부를 다시 하시게 되어 기쁘시구나 하고 지레짐작 할 뿐이었다.
6개월의 휴학이 끝났고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정신 없는 학기 초가 지난 후, 미국으로 여행 온 부모님 편으로 언니와 나를 수신자로 한 하얀 편지 봉투 두 개를 받았다. 뜯어보자 편지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흰 종이 위에, 반듯한 줄이 그어져 있었고, 그 위로 익숙한, 정갈한 글씨체가 보였다. 할머니께서 처음 써주신 편지였다. 그때 알았다. 글쓰기는 마음과 마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소통의 통로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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