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아이 아버지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이와 가위 바위 보를 해서 계단 오르기 게임을 했습니다. 헌데 제가 자꾸 이기자 아이가 져달라고 화를 내더군요. 이럴 땐 져줘야 합니까, 정의가 뭔지 설명해야 합니까?”
그 진지함 앞에 송구하게도, 나는 질문에 박장대소했다. 가의 바위 보를 정의를 구현할 진지한 대결로 본 그의 태도가 너무 비장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고민의 본질은 내 웃음보다 훨씬 무겁다. 옳고 그른 기준을 잘 알고 지키는 일은 너무 어렵고, 알고 지키지 않았을 때 받을 수 있는 가능한 고통은 너무 잔혹해서다. 혹자는 이 어려움을 피하려고 적당히, 중립을 지키며 살라 한다. 옳고 그른 경계를 과히 따지지 말고,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사건들은 모양 좋게 덮고, 나쁜 일에서 옳은 점을 찾고 옳은 사건에서 틀린 점을 찾을 줄 알라는 것이다.
중립은 어느 쪽의 편에도 서지 않는 태도가 아니다. 옳은 것과 아닌 것을 같은 무게로 놓고 ‘모두 다 똑같다’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태도는 누구에게도 비난받고 싶지 않은 회색분자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치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일이 옳고 그름을 정의와 상식을 기준으로 판단해 납득할 수 있는 쪽에 서는 것이 중립이다. 이것이 옳고 그른 기준을 알고 지키는 삶의 태도다. 이는 타인의 무분별한 공격에서 보호하고 싶은 개인 모두가 불가피하게 따라야 하는 생존 방법이기도 하다. 자신을 포함한 구성원이 공정한 규칙을 따르도록 권해서 그 공동체가 중립을 지키는 데 합의하도록 하지 않으면 어떤 법과 기준을 따르는가에 관계없이 개인은 언제고 타인의 욕망과 권력 앞에 수난당할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했던 구성원이 만든 사회에선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누구의 지지와 도움도 구할 수 없다.
사소한 말, 행동에 일일이 시비를 가리려 비판을 일삼아선 불편해질 뿐이다. 숨 쉬고 물마시듯 생활의 일부로 옳고 그름의 경계를 고민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원칙을 지키려는 진지함과 농담 사이에서 그 의미를 헤아리는 태도가 공정한 세상을 만든다.
아버지와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져 줄 것을 요구했던 아이는 아버지가 어떤 결정을 했던 바른 아이로 자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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