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아들에게서 영화를 보러 가자는 전화가 왔다. 벌써 한 번 봤지만 아주 감명 깊어서 꼭 나와 함께 다시 보고 싶다고 했다. 레미제라블! 벌써 보고 싶었지만 그냥 벼르기만 하던 영화였고 몇 년 만에 해 온 아들의 청이라 가슴이 뿌듯하고 들떴다. 빅토르 위고가 19세기 전반 프랑스의 비참한 현실을 그려낸 대작, 제목은 ‘불쌍한 사람들’이나 ‘비참한 사람들’로 직역이 되겠지만 내가 중학교 때 감명 깊게 읽었던 그 책은 주인공의 이름을 딴 ‘장발장’이 제목이었다.
중학교 3학년 역사 시간, 전날 밤 읽기 시작한 ‘장발장’은 나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고, 수업시간이었지만 교과서나 달달 외우면 자신 있던 과목이었기에 선생님 눈을 속이자고 작정하였다.
책상 위에 펼쳐 세워 놓은 교과서 안에 ‘장발장’을 펴 숨겨놓고 한참을 읽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의 강의가 잠시 멎는 것도 모르고 그 책에 흠뻑 빠져 눈가가 촉촉해 올 즈음, 옆자리의 학생이 나의 팔을 툭 친다. 벌떡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자 선생님과 모든 학생의 눈이 나를 향해 꽂혀있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화가 잔뜩 난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양상수, 너 지금 내 강의 듣고 있었어?”
“네? 네, 아 아, 아뇨.”
“그럼 뭘 하고 있었지?”
변명할 새도 없이 선생님은 어느새 내 곁에 서 계셨고, ‘장발장’은 보기 좋게 압수당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선생님께 미안했고 아이들에게 창피했다.
이번에 본 레미제라블은 어린 시절 그 소설을 읽을 때와 같은 감동을 자아내리라는 기대는 숫제 하지 않았다.
첫째 이유는 시간적으로 한계가 있는 영화에서는 책에서나 설명이 가능한 자세한 환경을 설명할 수는 없고 세부사항이 모자란 상태에서 마음을 통째로 끌어들이는 것 역시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둘째로는 원래 뮤지컬 팬이 아닌 나는 인간의 심오한 마음이나 느낌을 노래로서 전달하기엔 진지함이 많이 결여된다고 느껴왔던 터에서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쏟아 내리치는 물길 속에서 때 묻은 얼굴에 거의 알몸인 죄수들이 밧줄로 배를 끌어들이는 첫 장면부터 압도시킨 레미제라블은 나의 선입관을 허물어뜨리고 내 생애에서 본 거작 중 하나로 내 가슴에 와 안겼다.
인간의 삶과 고뇌, 정의, 우정, 사랑, 그리고 희망을 노래로 이토록 절실히 그려낸 영화가 과연 몇 편이나 될까.
이 영화에 완전히 도취했던 두 시간 반은 아쉽게도 너무 빨리 달음질쳐버렸다.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로 치자면 수정처럼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판틴이 부른 “나는 꿈을 꿨어요”이겠지만 나를 훌쩍이게 한 건 학생들이 정부에 맞서 투쟁하다 쓰러져간 장면이었다. “말 못 할 이 슬픔/아픔만이 계속 이어지고/ 빈 탁자에 빈 의자들/내 친구들 지금은 죽고 없네/….” 죽어간 친구들을 향한 처절한 이 노래를 마리우스가 부를 때, 나는 눈가를 몇 번이고 훔쳐야 했다.
현장에서 최초로 직접 녹음을 한 뮤지컬 영화, 내가 중학교 시절 가장 좋아했던 책이 이번에는 화면을 통해 다시 나를 울리다니…. 이 멋진 영화 한 편을 아들 덕분에 볼 수 있었던 게 참 다행이다. 다시 ‘레미제라블’을 읽은 후 이 영화를 차근히 음미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때는 우리 집 거실에서 편한 자세로…. 눈물이 줄줄 흘러도 상관치 않을 테다.
사랑표현에 인색한 엄마이지만 아들에게 고맙다는 메일을 이튿날로 보냈다. 가슴 속에서 튀어나오려는 또 하나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
“사랑한다,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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