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서귀포에 작년 봄 새 관광명소가 문을 열었다. ‘박물관은 살아있다’라는 긴 이름의 박물관이다. 밤만 되면 모든 전시물이 살아나 날뛰며 소동을 일으키는 미국 코미디영화 ‘박물관이 살아 있다’(Night At The Museum)에서 힌트를 얻은 모양이다. 액자 속에 갇힌 모나리자가 살아 움직이는 등 착시효과를 이용해 폭소를 터뜨리게 만든다.
그 박물관은 흥미 위주의 눈속임 테마 파크일뿐이지만 원래 모든 정통 박물관들은 정말로 살아 숨 쉬며 인류역사의 발자취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한 나라의 과거를 알려면 박물관에 가보고, 미래를 알려면 도서관에 가보라는 말이 있다. 박물관이 다루는 분야도 각양각색이다. 시애틀엔 항공기 박물관이 있고 한국엔 김치 박물관, 만화박물관까지 있다.
지난 토요일 시애틀 다운타운의 셰라톤 호텔에서 이색 경매행사가 열렸다. 윙 루크 박물관을 위한 모금 디너파티였다. 참가비가 일반인은 200달러, VIP는 290달러로 만만찮았다. 아시안 참석자들 외에 밥 퍼거슨 워싱턴 주 법무장관 등 주류사회 명사들도 많았다.
한인사회엔 생소한 편이지만 윙 루크 박물관은 인권과 사회정의 구현을 표방하는 특색 있는 박물관이다. 정식 명칭은 ‘아시안 퍼시픽 아메리칸 경험 윙 루크 박물관’으로 꽤 길다. 중국이민 2세인 윙 루크는 1962년 시애틀 시의원으로 당선돼 서북미 최초의 아시아계 선출직 공직자가 됐으나 1965년 임기를 1년 남기고 40세에 경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워싱턴대학 근처 세탁소집 장남이었던 루크는 루즈벨트 고교에서 학생회장을 했고, 미 육군에 입대해 동성 무공훈장을 받았으며 그 뒤 법대에 진학해 변호사가 됐다. 시의원이 되기 전 주 법무차관으로 5년간 재직했고 시의원이 된 후엔 시애틀시의 주택관련 인종차별금지 조례를 통과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오늘날 많은 한인이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
루크의 또 다른 꿈은 아시안 박물관 설립이었다. 그의 사망 2년 후인 1967년 친지들이 그 꿈을 실현했다. 차이나타운의 한 구멍가게에 ‘윙 루크 기념박물관’ 간판을 걸었다. 이 박물관이 1987년 장소를 옮기면서 ‘윙 루크 아시안 박물관’으로 승격했고, 다시 2008년 다운타운 I-5 고속도로 옆 3층 건물로 확장 이전한 후 2010년 현재의 긴 이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내가 찾아간 윙 루크 박물관은 실망적이었다. 한국관련 전시물이 여전히 초라했다. ‘조씨 가족’이 기증한 옛 천주교 한글성경이 펼쳐져 있고, 고 전계상 박사(전 시애틀 한인회장)의 워싱턴대학 유학시절 모습이 담긴 손바닥 만한 사진, 1950~1965년 ‘한국전 신부’ 6,000여명이 미국으로 건너와 ‘새로운 기쁨, 새로운 고난’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전부였다.
반면 중국과 일본 전시물은 ‘화려’했다. 중국인 9,000여명이 철도공사에 동원돼 전체 인부의 90%를 점유했지만 이들이 9명 중 1명꼴로 피살됐음을 고발하는 코너, 제2차 대전 중 오지의 가건물에 강제 수용된 시애틀 지역 일본인 7.050명의 애환을 증언하는 기획 전시물이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3층엔 중국이민 3세인 게리 락 전 워싱턴주지사 기념 도서실이 있다.
한인들에겐 박물관이 우선순위는 아니다. 그래서 후원행사는 항상 초라하다. 그렇지만 박물관 건립과 후원이야말로 한인들이 열심히 참여해야 할 사안이다. 중국사회도, 일본사회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단계를 거쳐 지금의 박물관들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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