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기어가는 너를 향해
내리칠 찰나
납죽 몸 낮춘 벌레 한 마리
피한 게 분명한 녀석이
죽은 척 납죽
살의는 없었으나 짐짓 힘을 다해 내리친
나에게 보은이라도 하려는 듯 납죽
영영 숨이 끊어진 척 먼 딴 데를 보고
나 역시 서슬 시퍼런 척 납죽
까무러지는 척 정신을 잃은 척
부리나케 쫓아와
숨이 가쁜 듯 납죽
기어들어가는 척 숨넘어가는 척
애도하는 척 납죽
그게 탄로 나 짐짓 딴 데를 보는 척
눈시울 닦는 척
그 바람에 한숨 돌리는 척
순식간에 몸 낮춰
장롱 밑바닥으로 납죽
최영철(1956-) ‘납죽’ 전문
작은 벌레와 사람과의 짧은 만남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는 시이다. 화자에게 한 대 얻어맞아 납작해진 벌레, 한 번만 더 내리치면 끝날 운명에 처한 그는 온갖 재주를 동원해 탈출을 시도한다. 측은한 듯, 능청스러운 듯, 가진 꾀 몽땅 바쳐 화자의 시야를 벗어나 마침내 장롱을 향해 진입하는 벌레는 미물이 아니라 영물이다. 사람과 다를 바 없으니 어찌 단칼에 내리치겠는가. 서슬 퍼런 척, 길을 열어주는 화자의 풍자와 해학이 날카롭고도 인정스럽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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