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
나희덕 (1966-) ‘잉여의 시간’ 전문
마흔일곱, 존재의 변경으로 조금 벗어난 시간에 화자는 이르러 있다. 그것을 그는 공터라 부른다. 나 밖의 시간이며 기억의 시간이다. 현재의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 공터는 나 아닌 것들로 가득하다. 이 환한 공터를 어떻게 맞을 것인가. 잉여의 존재가 되는 오후 네 시, 문뜩 다가오는 소외는 나 밖의 세상을 향해 더욱 깊은 눈을 뜨게 하는 시간이리라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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