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캘리포니아·애리조나서 특히 심한 ‘진균증 ‘
▶ 흙 속에 있던 병원균 폐로 침투, 뼈·눈·뇌로도 번져 확실한 치료약 아직 없어…남서부서 연 160여명 숨져
전직 경찰관인 어윈 클로르만이 컨 메디칼 센터의 로이스 존슨 박사로부터 수막구균 뇌수막염 치료를 받고 있다.
소리 없는 유행병’이 번지고 있다.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놈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환자들의 집단적인 신음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치명적 질환이 유행하면 나라 전체가 시끌벅적하게 마련인데 계곡열(valley fever)로 불리는 이 병은 변변한 치료약조차 없는데도 의료 당국을 향한 환자들의 불만이나 ‘주문’이 거의 없다.
곰팡이균이 일으키는 질환의 공식 명칭은 진균증(coccidioidomycosis)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진균증은 곰팡이균, 혹은 구균이 일으키는 모든 병을 한데 싸잡아 일컫는 용어이기 때문에 그 범위가 대단히 넓다. 곰팡이균이 인체의 어느 부위를 침범했느냐에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병증 또한 다양하다.
진균증은 흙이 온상이다. 흙속에 있던 미세한 곰팡이 포자(홀씨)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폐 속 깊숙이 들어가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물론 포자가 폐 안으로 들어갔다 해서 모두가 병에 걸리지는 않는다.
폐 안으로 들어간 구균은 주로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지만 뼈와 피부, 눈, 혹은 뇌로 번지기도 한다.
진균증이 맹위를 떨치는 지역은 미국 남서부로 특히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에서 가장 많은 환자가 발생한다.
캘리포니아에서도 샌호아퀸 밸리가 진균증의 온상으로 꼽힌다. 계곡열, 즉 밸리 피버라는 명칭도 샌호아퀸 밸리에서 유래됐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샌호아퀸 밸리는 캘리포니아의 곡창지대다.
흔히 ‘cocci’ 즉 구균으로 통하는 이 병은 귀신도 떤다는 LA 경찰국의 36년차 고참 경관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어윈 클로르만 경사(Sgt.)는 산전수전에 총격전까지 겪은 베테런 경관이지만 이번처럼 생명에 위협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치를 떤다.
내근보다 순찰업무를 선호했던 그는 구균이 뇌로 들어가 수막구균 뇌수막염을 일으킨 케이스다.
총보다 무서운 세균으로 그의 삶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망가졌다. 본격적인 치료를 받기 위해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일주일에 세 번, 한 번에 4시간씩 차를 몰아 컨 메디칼 센터를 오간다. 그곳에서 클로르만은 로이스 존슨 박사로부터 자신의 척수액에 강력한 항진균제를 주입받고 있다.
자신의 딸도 온건한 형태의 진균증을 앓고 있다는 존슨 박사는 “이 병은 건강만이 아니라 삶 자체를 파괴한다”고 말했다. 병의 진행속도에 발맞춰 이혼, 실직, 파산이 따라오곤 한다.
토드 셰퍼(48)의 인생 역시 구균의 대공세로 해체되기 일보직전이다. 파소 로브레스에서 포도농원을 운영하며 자신이 재배한 피노누아 품종으로 상까지 받았던 그는 주치의로부터 길어야 10년밖에 살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그게 10년 전의 일이다. 그의 ‘모래시계는’ 이미 멈추어선 상태다.
셰퍼의 외모는 아직도 멀쩡하다. 선 굵은 얼굴에 듬직한 몸집을 지닌 그는 어디로 보나 ‘훈남’이다. 하지만 척추와 뇌에 진균의 습격을 받은 셰퍼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다.
이미 한 차례의 뇌졸중과 두 차례의 심각한 심장발작을 겪은 그의 폐에는 큼직한 구멍이 뚫려 있다. 수시로 엄습하는 통증 때문에 이젠 말도 길게 하지 못한다.
그렇게 좋아하던 와인과도 오래 전 작별했다. 그런데도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토악질을 해댄다.
셰퍼는 자신의 포도농원인 퍼시픽 코스트 비녀드를 조성하기 위해 트랙터를 직접 몰며 발을 갈다가 흙 속에 숨어 있던 병원균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믿는다.
고통 속에서 손 놓고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일은 끔직하다. 그는 자신을 간병하느라 초주검이 된 아내 태미(37)에게 “새 삶을 꾸리라”고 벌써 여러 차례 권했다.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남편 곁에서 함께 시들어가기에는 그녀는 “너무 젊고 아름답다.”미국의 남서부 지역에서는 매년 2만건 가량의 진균증이 보고된다. 진균증은 무서운 병임에는 틀림없지만 곰팡이에 노출된 사람들이 모두 발병하는 것은 아니다.
감염된 사람 가운데 약 9% 정도가 폐렴을 일으키고 1%는 폐 이외의 다른 부위로 세균이 번져 심각한 합병증을 일으킨다. 이로 인한 사망자는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를 중심으로 연 160명 정도다.
지난주 연방 법원은 캘리포니아 샌호아퀸 밸리 지역의 8개 주립 교도소 가운데 두 곳에 수감된 HIV 보균자 등 진균증에 취약한 재소자 2,600명을 다른 지역의 수감시설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2011년 아베날과 플레즌트 밸리 등 두 곳의 주립 교도소에서 535건의 진균증 감염사례가 보고된데 따른 결정이다. 같은 해 캘리포니아 주립 교도시설에서 발생한 진균증 총 건수는 640건이었고 이로 인한 입원 치료비로 230만달러 이상이 사용됐다.
2개 주립 교도소 재소자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90일 이내에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 수감해야 하는 캘리포니아주 정부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일부에서는 주 정부의 재정이 거덜이 난 상태에서 재소자들의 건강을 챙기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는 불만도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인권단체들은 “만약 공장이나 학교, 혹은 호텔에서 이처럼 많은 수의 진균증이 보고됐다면 정부 당국은 당장 폐쇄조치를 발령했을 것”이라며 정부의 늑장대처는 명백한 “차별행위”라고 엄포를 놓았다.
진균증 환자는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릴 때 부쩍 늘어난다. 많은 과학자들은 감염건수 증가가 기후 패턴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
애리조나주 정부의 검역관인 케네스 코마추는 도시확장 추세가 진균증 발병 증가의 또 다른 이유일 수 있다고 말했다. 집과 공장을 짓기 위해 땅을 갈아엎을 때 상당수가 구균에 집중적으로 노출된다는 지적이다.
계곡열은 1930년대 모래바람에 자주 강타를 당했던 미국의 대평원 지역에서 자주 보고됐고 2차 세계대전 중 미 서부 황무지에 설치됐던 일본계 거류자 수용소에서도 많은 환자가 나왔다.
이처럼 생소한 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치료약은 나와 있지 않다. 세균이 인체의 어느 부위에 자리를 잡느냐에 따라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단 한 가지 치료약은 있을 수 없다.
다만 닐슨 바이오사이언스라는 제약회사에서 피부검사를 통한 검사방법을 개발했지만 상업화하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따라 수포로 돌아갔다.
세상은 넓고 병균은 무한하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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