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해를 보내고 돌아와서
투명하고 첨언 없는 물 한 컵을 그로부터 받는다
그는 손도 없이 내 앞에 서 있다
내가 밟고 하루를 다니는 그 땅에서 올라온 물
설계도 도모도 없다, 선도 긋지 않았지만 다만
하루해를 보냈다는 대가로 받는
나의 물이다
몫은 너무나 작은 것,
다만 고갈되어가는 영혼의 목만 잠시 축이는 것
하지만 모든 인간이 한순간에 마시는 신성한 물
두려움에 떨면서 나는 컵을 든다, 물이 컵을 깰까,
고개 숙여 천천히 마신다
순간 아득한 곳까지 가는 것이 불가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문득 한 컵의 물을 들고
나는 물의 나가 된다
너무 먼 도시를 돌아서 온 이 한 컵의 꿈의 물은
절망의 맨 끝, 앞에 서서 간다.
고형렬(1954-) ‘지구, 한 컵의 물’ 전문
물을 마시는 아주 평범한 일이 제례처럼 신성한 일이 될 수도 있다. 함부로 파고 어지르고 밟고 다니는 지구로부터 올라온 물이 고갈되어가는 시인의 영혼을 투명하게 적신다. 물은 또한 얼마나 고단한 여정을 거쳐 이곳에 이르렀는가. 그리하여 더욱 맑고 깨끗해진 물을 마시는 일은 지구의 깊은 곳과 만나는 일, 수맥을 따라 생명의 근원에 이르는 겸허한 여행이며 휴식이다. 절망 앞에 길을 열며 고단한 자를 다시 꿈으로 채우는 한 잔의 물은 기실 얼마나 신성한가.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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