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웅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 중략 …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에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남진우 (1960-) ‘타오르는 책’ 전문.
한 시절 온 세상은 뜨거운 책이었고 모든 책은 또한 불타는 세상이었다. 사랑과 이상, 혁명과 자유, 명명하는 어디서나 그들은 불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관념과 실재 사이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질주하던 시절은 갔다. 아침이 가고 저녁이 오듯 청춘은 떠나갔다. 이제는 식어버린 말들에 갇혀 잃어버린 불을 꿈꾸는 자여. 죽은 듯 웅크린 언어를 낮은 목소리로 다시 호명할 때 그것들은 또 다른 불의 노래로 고요히 응답해오리.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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