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가로변
은행나무 한 그루가 고아처럼 자라고 있다
깨어진 보도블록을 사이에 둔 새마을전파상에서는
슈베르트의 송어가 느릿하게 유영하고 있다
가끔은 지느러미가 손상을 입었는지
음계의 선을 이탈하여 빠르게 움직인다
갑자기 찌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긴장된 아나운서의 속보가 흘러나오고
그럴 때마다 놀란 주인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불러내어 숭어의 상처 부위를 치료하였다
전파상 안은 다시 평온한 바다로 변하고
숭어는 심연을 향하여 큰 호흡을 몰아쉰다
음파가 은행나무에 부딛칠 때마다
가지 끝의 전선줄은 검푸른 수평선이 되어 간다
그 위에 나란히 앉아 떠날 채비를 하는
철새들이 작은 섬 같아 보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황금빛 잎사귀들이 떨어지며
노출된 뿌리를 감싸준다
나의 주위를 맴돌았던 삶과 시간들이
나무속에서 소용돌이치며
화석이 되어 가고 있다
정겸 (1957- ) ‘은행나무에게 과거를 묻다’ 전문
허술한 전파상 앞에 작은 은행나무가 살고 있다. 전파상에서는 슈베르트가 흘러나오기도 하고 긴급한 뉴스가 들려오기도 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노래들이 은행잎에 닿으면 하늘은 바다가 되고 전깃줄은 수평선이 되고 새들을 작은 섬이 된다. 은행나무는 새마을전파상 주변에서 자라나는 고아 소년. 나날의 꿈과 아픔이 나이테 속으로 소용돌이치며 잠들고 있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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