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생각
▶ 김 종 영 <이태리 광학 회장>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인 우리들을 일컫는 공식 명칭은 무엇일까? 얼마 전 이곳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한국의 한 정치인은 “해외동포, 즉 재미동포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 그것이 한국 정부의 공식 견해인 모양이다.
어떤 명칭으로 불리든 우리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명칭 속에는 우리가 서있는 자리를 확인하고, 삶의 자세를 결정하는 상징적 의미가 깔려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코리안-아메리칸’이라는 낱말과 ‘재미동포’라는 단어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크게 다르다. ‘재미동포’라는 낱말의 방점은 ‘재미’(在美)가 아니라 ‘동포’에 찍혀 있지만, ‘코리안-아메리칸’의 경우는 ‘아메리칸’에 더 무거운 의미가 실려 있다.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한국계 미국인’이 된다.
이렇게 보면, ‘재미동포’와 ‘한국계 미국인’은 같은 낱말이 아닌 것이다. 어느 쪽에서 보는가, 스스로의 자리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당연히 의미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재미동포’로 생각하는가, ‘한국계 미국인’으로 생각하는가에 따라 삶의 자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내 개인적 의견을 말하자면, 나는 ‘코리안-아메리칸’ 즉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고, 이곳의 삶에 충실하려 애쓰는 한국 출신의 미국인이다. 그러므로 모국인 한국의 현실보다 지금 살고 있는 미국의 움직임에 더 관심이 많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의 현실에 유달리 큰 관심을 가지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시시콜콜 분개하는 사람들이나, 한국에 살 때 있었던 ‘왕년의 금송아지’를 들먹거리는 태도, 마치 대단한 정치평론가라도 된 듯 유창하게 쏟아내는 열변, 한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무아무개가 내 동창이나 고향 친구라고 떠버리는 사람들… 등등이 영 못마땅하다.
이렇게 한국만을 애타게 바라보는 ‘해바라기’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고향을 그리워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지금 뿌리 내리고 있는 현실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떠나온 조국만을 애타게 바라보는 해바라기들이 많은 것 같다. 사방에 해바라기가 요란하게 피어 있어 어지러울 지경이다. 하다못해 나는, 한국을 본국(本國)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럼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은 지국(支國)이란 말인가. 우리가 뼈를 묻을 땅이고,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곳이 어째서 지국일 수 있는가?
오래 전에 한 시인이 ‘서울시 나성구’라는 시집을 펴냈고, 그 ‘서울시 나성구’라는 말이 한동안 미주 한인사회를 상징적으로 일컫는 유행어가 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서울시 나성구’라는 유행어 속에는 미국 내의 한인사회를 한국의 한 변두리 동네 정도로 생각하는 ‘타향살이 근성’을 비판하는 자기반성과 함께, 그런 마음가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나는 해석한다. 그래서 아직도 ‘서울시 나성구’라는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람이 많은 현실이 안타깝다.
물론 모국이나 고향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처럼 숙명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외국에서 타향살이를 하다 보면 자연히 애국자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내가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한층 진정한 애국이라고 믿는다. 이곳은 내가 선택한 제2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내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면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것이 곧 모국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지름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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