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 69돌 특별기획 시리즈 - 독립군 후손에게 듣는다
▶ (5) 허응숙 목사 아들 허경화.경천 형제
허경화(왼쪽)·허경천 형제가 조부 허응숙 목사의 독립운동 활약상을 소개하고 있다. 형제의 손에 들린 사진 속 오른쪽이 조부 허응숙 목사. 왼쪽은 아버지 허태형 선생.
“기독교와 독립운동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조부 허응숙 목사가 신앙을 갖고 독립운동에 나선 흔적을 찾아보면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죠.”
퀸즈장로교회의 장로인 허경화·허경천 형제는 조부 허응숙 목사가 신앙심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고 강조했다. 허 형제에 따르면 허응숙 목사는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 중화동에서 부친 허권씨와 모친 백권신씨의 3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허응숙 목사는 구한말 기독교를 받아드린 조부 허득 선생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믿었는데, 해서제일학교와 재령성경학교 등에서 수학한 뒤 황해도의 장연, 신천, 송화, 안악 일대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선교활동에 매진하던 허 목사는 30세가 되던 1919년 3.1만세운동이 터지자 열흘 뒤인 11일 신천군 문화읍 장날을 이용해 교인 300명을 이끌고 박형묵, 강영탁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했다.
허 목사 등 일행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자 장날에 모인 장꾼들까지 나서며 천여 명이 시가지를 누비며 행진했는데, 그는 선두에서 서서 시위행진을 이끌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당시 조부는 교회 목사님께서 ‘내가 모든 책임을 질 테니 너는 도망가라’ 하셔 몸을 피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조부는 ‘독립운동자가 어찌 일경이 무서워 도망쳐 돌아오냐’는 부친의 호된 꾸짖음에 다시 자수해 옥고를 치르셨다고 합니다.“
허 목사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으며, 왼쪽 귀가 파열되고 발톱이 모두 뽑히는 고문을 당했다. 출옥 후에는 동생 허성목 선생의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서 군자금을 모금하는 지하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허 목사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허 목사의 삼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에 나섰는데, 동생 허성목 선생은 김좌진 장군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해 교육위원장과 선전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1927년 일경에 체포돼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40세 나이로 순국했다.
허 목사의 막내 허성민 선생 역시 만주에서 생활하며 독립군자금 조달에 도움을 줬다.
허 형제는 “매년 이맘때면 조부가 더욱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전파하고 국가에 대한 애정을 몸소 실천한 조부를 생각하면 마음이 뿌듯하고 자부심도 느낀다”고 말했다.<조진우 기자> 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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