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교회 의료봉사 팀으로 간 남미 페루에서 현지 한인 여고생 조세핀을 만났다. 그는 내가 환자를 진료하는 나흘 간 스패니시 통역을 맡아주었다. 온 종일 계속되는 환자들의 진료에 같이 임하면서 대화하는 중에 난 조세핀 가족의 생활상을 머리속에 그릴 수 있었다.
아버지는 페루 원주민을 대상으로 힘든 사역을 성실하게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딸 셋을 데리고 쪼들리는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조세핀은 미시간의 대학 사진학과에 조기 입학되어 학비와 기숙사비는 장학금으로 받았으나 식사 보조비용은 없다고 했다. 물론 부모님의 도움은 생각도 못하고, 대학에 입학하면 학업과 일을 병행하여 벌어야 한다고 했다.
페루를 떠나오며 조세핀에게 미국 대학에 입학하면 LA를 방문하라고 당부하고 헤어졌다. 그는 지난 추수감사절에 대학 3학년생인 언니와 함께 우리 집을 방문했다. 싼 비행기표를 구하느라 (편도60불) 미시간에서 LA까지 12시간 걸려왔다고 했다.
반갑게 그들을 맞은 후 집 입구에 벗어 놓은 그들의 운동화에 구멍이 두 곳이나 나 있는 게 우리 부부의 눈에 들어왔다. 아니, 우리 가슴에 들어왔다. 사진전공이지만 좋은 카메라는 비싸 아직 구입하지 못한 것도 알았다.
나에게는 몇 년 전 선물로 받은 사진사들이 사용하는 카메라가 상자 속에서 잠자고 있지 않은가…이 카메라는, 사용도 안하고 보관된 채 상자 속에 누워만 있는데, 만약 이 카메라가 조세핀에게 가면 백배, 천배 귀중하고 유용하게 쓰여 질것이다. 카메라를 조세핀에게 주었다. 운동화나 카메라, 우리 주위에는 쓰지 않고 갖고만 있는 것이 많으리라. 그러나 지구 저편 한구석 보여지지도 들려지지도 않는 곳의 누군가에게는 절실히 필요하고 유용하게 쓰여 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음날, 함께 간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 백화점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구두와 명품 운동화들이 진열대마다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두 자매는 신발 가게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꼭 필요한 $10-20정도의 옷가지 몇 개만 집어 들었다.
다음날 어두컴컴한 새벽 미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공항버스 정류장에선 입구를 빠져나가는 제비처럼 날씬한 명품 구두, 나이키 운동화, 파티장에서 날렵하게 춤추던 구두, 유흥장의 술 자욱이 얼룩진 구두들이 그들의 구멍 뚫린 운동화 옆을 수 없이 스쳐 갔다.
작별하기 전 나는 그의 손에 돈을 쥐어 주며 가자마자 좋은 운동화 한 켤레씩 사기를 권유했다. 몇 푼의 적은 돈이나 운동화보다는 내 마음이 그들의 마음속으로 따뜻하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개찰구로 들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은 전혀 측은해 보이지 않았다. 패기가 넘쳐 보였다. 맑은 물방울을 튀기며 물결 센 강물을 거슬러 목표를 향해 힘차게 헤엄쳐 올라가는 연어들 같이.
불안정한 사치, 낭비, 물질에 연연하지 않고, 타인의 시선이나 간섭의 궤도로 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들의 활기 찬 발걸음이다. 젊음의 투지가 느껴지고, 낭만이 보였다. 그들은 희망과 미래의 보다 나은 길을 믿기 때문에 달리고 있는 것이다.
바래주고 돌아오는 길, 그들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왔다. 그날 새벽 아내는 떠나는 그들을 위해 유부초밥 도시락을 만들어 싸주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갈아 탄 기차 좌석에 마주 앉아 유부초밥에 감동하며 점심을 먹고 있어요!”…조그만 것에도 감사를 하는 삶의 겸손이 느껴진다.
어둠이 걷히고 눈부시게 환한 새벽 첫 햇살 속에 잊은 채 정지되어 있던 내 유년시절의 추억들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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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청원 내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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