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고 보니 옛날엔 보이지도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또 깨달아진다. 젊었을 때엔 욕심, 샘이나 질투 때문에 자신이 가진 장점이나 귀한 것들이 별로 대단하게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가 가진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들에 대한 가치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게 아마도 철이 들었다는 것일 게다. 옛날엔 남편의 직장이나 수입, 자식들이 학교에서 얼마나 두각을 나타내나,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모나 학벌, 어느 동네에서 얼마나 큰집에 살고 있나 등등을 비교하며 사람들을 평가하고 이것들에 행복의 기준을 두고 살았던 때가 있음을 고백한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허망하며 가치가 없나를 새삼 깨달으니 나이가 든다는 것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나 이웃들을 만나면 자연히 자식들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는데 내 아이들은 크게 출세한 녀석도 없고 그렇다고 못사는 녀석도 없다. 그저 평범한 직업들을 가지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모두다 집 하나씩 지니고 자식들을 잘 키우며 그야말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들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나는 정말 고맙고 기특하다. 내게 돈 달라고 손 내미는 녀석 없고 아프다고 병원에 누워있는 녀석 없고 나쁜 짓해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녀석 없으면 내 인생은 즐거워! 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10년 있으면 하버드 졸업생이나 버클리 졸업생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조금 더 성공하고 조금 더 큰집을 지니고 조금 더 나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만 빼면 미국에서 먹는 것들은 거의가 평등하다. 조금 비싼 고기를 먹거나 조금 질이 떨어진 고기를 먹는 것만 빼면 한인들이 먹는 밥이나 김치는 다 똑같다.

의사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잘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복이라고. 내 주변에는 이런 것들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걷는 것도 워커에 의지해야 하고, 화장실 가는 것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쯤 되면 인간의 존엄성은 없게 된다.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부위를 남의 손을 빌려 도움을 받고, 밥도 내 손으로 먹지 못하게 될 때쯤에는 산다는 것이 기쁨이 아니요 고통이며 저주다.

얼마 전 한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의 남편이 치매가 아주 심해져서 이곳 미국의 시설을 알아보니 너무 비싸서 엄두가 안 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가서 사정을 알아보니 다시 한국 국적을 회복하면 자신이 600달러 정도만 내면 나머지는 한국정부가 다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나도 귀가 쫑긋해졌다.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지만 만약 어느날 요양원 신세를 져야한다면 하루 한끼는 한국 밥을 먹어야 하는 나 같은 사람들은 모두 보따리를 싸들고 귀국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웃에 살던 105세와 100세 노인부부가 일인당 매월 1만 달러씩 내야 하는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일년이면 둘이 24만 달러가 든다. 그래서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장기간 아프면 벌어 놓은 돈을 다 쓰고 죽는다는 말이 맞는구나 생각했다.

만석지기는 만 가지 걱정이 있어서 잠을 잘 못자도 노동자는 단잠을 잘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요즈음 나의 기도는 죽을 때까지 자긍심을 가지고 살다가 적당한 나이가 되면 품위를 지니고 죽고 싶다는 것이다.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죽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노인들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소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옥교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