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우리 부부의 대화 속에는 “몸이 아프고 이상하다”느니, “당신 치매 아냐?” 라는 말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기야 하루가 멀다 하고 내과 외과 치과 안과병원을 번갈아 들락거리다보니 몸이 많이 망가진 건 불문가지이고 친구와 약속한 날짜를 까먹거나 지인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등 내 스스로도 치매수준이 아닌가 걱정된다. 그럴 나이도 됐다 싶지만 이러다 아예 양로병원 신세를 지게 될까봐 겁이 난다.
새해 들어 내가 다니는 교회 사람들과 어울려 병원이나 양로원에서 요양 중인 환우들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할리웃 장로병원 재활병동에서 치료를 받는 분을 뵈었을 때는 몸이 아파 힘들어 하셨지만 우리들을 알아보고 대화도 할 수 있어 마음이 그리 괴롭지는 않았다.
같은 병원에 계신 다른 분을 방문했을 때 그분은 치매로 찾아간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낮선 사람처럼 우리를 바라보았다. 같은 공동체에서 오랜 기간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었던 교우들인데…무표정이 마음 아팠다. 내가 아무개라며, 나를 모르겠냐고 아무리 안타깝게 가슴을 두드리며 여쭤 봐도 묵묵부답이었다.
발걸음을 옮겨 한인타운에 위치한 양로병원을 방문했다. 많은 환자들이 휠체어에 앉은 채 복도를 따라 일렬로 죽 늘어서 있었다.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뿐 그들 표정엔 아무런 기대도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살아 있다는 것 외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살아 숨 쉬고 있음이 축복이고 희망이라지만 ‘그렇게 살아 숨 쉬고 있음이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하듯이 결국은 우리 모두가 가야하는 길인지도 모르지만 쓸쓸하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오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머릿속은 착잡했다. 내 미래의 모습을 미리 본 것 같아서다.
요즘 여기 저기 몸도 자주 아프고 기억력도 나날이 쇠퇴하고…나도 남들 가는 길을 그렇게 잘도 따라간다. 종내에는 양로병원에서 망각의 경지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양로 병원 다녀 온 것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하기야 한국에선 7,80대 노인들은 친지 병문안도 안가고 상가집 문상도 안가는 풍조가 은연중에 번지고 있다고 한다. 내 심신이 괴로울 뿐 아니라 조만간에 같은 처지가 될 터인데 굳이 인사치레를 안 해도 흉이 안 된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어두운 그늘은 가능한 한 피하고 싶다. 너무 매정한 생각인가?
누구나 젊어 한때 사랑은 아름다웠고 야망은 불탔었다. 그러나 사랑도 야망도 사라진 지금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젊어서 본 영화 ‘초원의 빛’에서 인용된 윌리엄 워드워즈의 “초원의 빛”(Splendor In The Grass)이 생각난다.
“한때는 그처럼 찬란한 빛이었건만 / 이제는 내 시야에서 영원히 사라져간 초원의 빛이여…꽃의 영광이여…//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슬퍼하지 말라. / 차라리 그 속에 깊이 간직한 오묘한 빛을 찾으리니.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초원의 빛도 사라지고 꽃의 영광도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이란 남의 손가락질을 받거나 동정어린 눈길을 받지 않고 의연하게 사는 것뿐이다. 지금은 사라진 초원, 사라진 꽃의 오묘한 빛을 가슴에 품고 살고 싶다. 비록 육신의 영광은 사라졌을지라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가꾸며 사는 일이다. 존엄한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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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광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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