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에 밀려 억지 춘향으로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괜스레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매일 걷는 게 일상이다. 마음만 먹으면 걷기보다 쉽게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 또 없다는 걸 이 나이가 되니 경험으로 알게 된다.
누구나 조금만 일찍 일어나서 새벽 산책길을 걸어보라. 어느새 매미 소리도 잦아들고 귀뚜라미 소리가 사방 천지에서 귀를 따갑게 울린다. 동네라지만 눈을 들어 둘러보면 울창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기 위해 배를 한껏 부풀리면 불어오는 초가을 바람을 타고 숲내음이 온몸을 파고든다. 왕복 한 시간을 걷노라면 결실의 계절답게 먹을 수 없는 크고 작은 열매들이 예고 없이 머리를 스치며 떨어지기도 하고 발에 밟히기도 한다.
숲에 가려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의 향기가 어느 값진 향수에 비교할 수 있을까? 간혹 산에서나 보았던 작고 빠알간 예쁜 열매가 알알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이름은 모르지만 먹을 수 있는 달고 새큼한 열매란 건 알아서 손을 뻗어 입에 가져간다.
한국에 있을 때 일이다. 산세가 좋고 한강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검단산을 남편과 함께 산행하곤 했다. 봄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밤나무 숲에서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것 같은 밤꽃이 사방에 향기를 날릴 때면 그 진한 내음에 코끝을 쥐고 재빨리 뛰어가곤 했다. 가을 추석이 다가올 때쯤이면 가지에 달린 주먹만 한 밤송이가 툭툭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진다.
‘아침형’인 나는 밤송이를 벌릴 집게와 비닐봉지를 준비해 산에 오른다. 날이 밝아 오면서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가시투성이 밤송이를 발견하고 발로 밟고 한 바퀴 돌리면 굵은 알밤이 톡톡 불거져 나온다. 가시에 찔린 것도 모른 채 밤송이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윤기가 자르르한 알밤을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 내려올 때쯤이면, 허리를 굽혀 부지런히 밤을 줍던 아낙네들이 알밤을 한 자루씩 등에 지고 삼삼오오 내 곁을 지나간다. 한편으로는 쑥스러워 묘한 웃음을 흘리고 있노라니 함께 산행하던 남편 왈 “자연은 자연에 돌려주어야지, 무슨 욕심으로 저런 담”하고 한마디 던진다.
하루는 발등에 툭 하고 떨어지는 밤송이가 주렁주렁 달린 큰 가지를 주우려고 엎드리는 순간 다람쥐가 위를 쳐다보는 나를 보고 구시렁거린다. 마치 그 밤의 임자는 나란 듯이. 겨우내 양식을 빼앗긴 것이 억울한 듯 노려보며 찍찍거리는 다람쥐의 앙칼진 눈을 본 후 비닐봉지 따위는 내 손에서 멀어진 기억이 난다. 사람의 식탐이 어디까지인지.
집 주위 숲속에서 자주 만나는 사슴 식구들이 있다. 운 좋게도 뿔 달린 우아한 자태의 키 큰 사슴도 보고, 알록달록 귀여운 꽃사슴 아기도 보게 되는 날은 마치 보너스 받는 기분이 된다. 사진 한 컷 찍으려고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가까이 다가가면, 순한 눈망울이 한껏 경계하면서도 폼을 잡아준다. 언제나 숲이 말 없는 친구처럼 곁에 있어 주어 건강뿐 아니라 글감까지 선물해 주니 이 아니 기쁘랴!
해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수많은 면적의 숲이 사라지고 있다. 인간의 실수도 있겠지만 빽빽이 자라고 있는 울창한 숲속의 나무와 나무가 서로 부딪히며 일어나는 자연재해도 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불타는 숲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저 산속의 불이 온 숲을 태울지라도 남은 재를 자양분 삼아 더 울창한 다음 세대의 수풀림이 만들어지겠지”라고.
(blog.naver.com/soon-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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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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