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마음만 먹으면 근교 사찰을 찾는 엄마 곁을 종종걸음으로 쫒아 다닌 적이 있었다. 향내가 풍기는 법당에서 엄마가 번뇌를 털어 놓는 염불시간에 방해가 될 세라 몰래 빠져 나와 혼자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뛰놀았던 그 곳은 엄마와 함께한 놀이터였다.
엄마는 평생을 뼛속 깊이 불교 신자로 사셨다. 장손 며느리 올케언니가 딸 넷을 연이어 낳고 다섯째를 가졌을 때도 새벽이면 목욕재배하고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드리더니 드디어 달나라에 아폴로 인공위성이 착륙하던 날 소원성취 손자를 안으셨다. 그날은 어느 때보다도 엄마의 믿음이 확신을 갖는 날이기도 했으리라.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나에게 찾아오고 크고 작은 방황이 잦아 들 때 자의반 타의반 발길이 닿은 곳은 엄마가 원했던 곳과는 달리 교회였다. 한 동안 새 옷을 입은 것처럼 교회는 어색하고 낯설었으나 갈급한 사람이 우물물을 찾듯 조금씩 믿음 속으로 젖어 들기 어언 20년. 믿음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안겨 주었다.
대체로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성격이 조금씩 마음 문을 열기 시작하자 다양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 왔다. 사람은 태초부터 다름을 인정하자는 긍정적인 사고가 마음을 통해 지금까지도 얼굴에 웃음을 번지게 한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고뇌의 시간도 짧게, 가볍게 넘길 수 있는 힘은 어린 시절 엄마가 느꼈을 믿음이 주는 확신이었으리라.
느닷없이 작은 아들과 함께 때늦은 미국생활이 찾아 왔을 때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귄다는 것이 또 다른 고역이었을 무렵 나이가 꽉 찬 아들이 결혼 상대를 만났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준다. 반가운 마음은 잠시, 천주교 집안에서 자란 모태신앙의 아가씨라 말했을 때 마음을 크게 한번 다 잡고 종교적인 갈등보다 기회를 잡는 지혜를 먼저 선택했다. 교회에서 성당으로 앉은 자리에서 조금 비켜 앉는다 라고 생각하자는 나의 지론이었다. 큰 그릇의 종교 지도자들도 타인의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변하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의사는 집도하기 전에 왜 기도를 하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니라”는 성경 속 말씀처럼 언젠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울림의 이야기 한 토막을 적어 본다.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아슬아슬하게 긴 장대 하나로 건넜던 어느 곡예사가 자신과 같이 폭포 위를 건널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말했을 때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곡예사의 아들이 손을 번쩍 들어올리자,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다 왜 이 위험한 폭포를 굳이 건너려고 하는가를. 아들의 대답: “나는 아버지를 믿으니까요.”
<윤영순 우드스탁,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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