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희 소아과전문의
병원에 인턴으로 취직이 되어 1968년에 뉴욕에 왔다. 전쟁을 겪은 지 겨우 십 년 남 짓 밖에 안 되었을 때, 몇 권의 책에서 얻은 지식 속의 미국은 가장 평등하고, 부유하고, 열심히 일하면 무엇이든지 다 해낼 수 있는 세상인 줄 알았다.
그 해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하고, 잘 알아듣지도 못 하는 뉴스는 매일 우리 얼굴과 닮은 월남사람들이 폭탄 맞고 죽어가는 사진으로 꽉 찼다. 환자들은 나를 의사라기보다는 한국 전쟁고아로 봤다.
가족 중의 누가 한국전에서 전사를 했고, 헌 옷과 돈을 모아 보냈노라고 했다. 그 누런 깡통에 들어 있던 버터와 한 입만 먹으면 설사를 한 치즈, 이들이 보냈구나 싶어 마음이 불편했다.
우리가 멋지다고 부러워 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인 남부에선 흑인은 백인과 같은 화장실을 쓸 수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때 막 봇물이 터진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있었지만, 남의 일처럼 느꼈을 뿐 공감을 못했다. 사실, 인종차별은 흑인만 억압한 것만이 아니고, 모든 유색 인종으로 향한 거부감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더구나 우리 아시안에 대한 편견은 한 꺼풀 살짝 덮였을 뿐, 벗겨보면 역시 깊다는 걸 처음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너희는 다 똑 같이 보여.” 중국인은 철도를 깔러 온 노동자의 후손, 공산주의자들, 일본인은 2차 대전의 적인 ‘잽’이었고, 한국인은 자기네의 희생과 구호물자로 살아남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다 같은 하류의 인종으로 봤을 것이다.
소아 신장 전문의가 되어 큰 병원에 취직이 되었을 때, 그때 막 시작된 신장이식 수술의 개척자였던 외과 과장에게 초년병으로 신고식을 하러 갔다. 커다란 사무실에 아주 왜소하고 유난히 까만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약속 시간인데 닥터 K는 어디에…?” 선 채로 머뭇거리는 내게 그가 “닥터 킴, 어서 오시오. 주말에 일본에 가서 수술을 하고 와서, 시차 때문에…”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이름만 들었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가 흑인이라는 걸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닥터 K는 신장이식 수술로 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많이 살렸다.
병원을 쉬는 날엔 교외에 사는 친척 언니 네를 방문하곤 했다. 한번은 실수로 버스를 잘 못 내렸다. 공중전화통도 보이지 않아 길가에 서서 난감해 있는데, 차 한대가 내 앞에 멈추더니 도움이 필요하냐고 했다. 운전수는 사정을 듣더니, 날 언니 집 앞에 잘 데려다주고 갔다. 차를 돌려 손을 흔들고 가는 그가 흑인임을 그때야 알았다. 내 얘기를 들은 언니는 얼굴이 하얘졌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오십년이 지난 지금 나도 가슴이 철렁한다. 그 동안 흑인과 범죄를 연결하고, 그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된다는 걸 은연중에 배운 거다.
직접 내가 불이익을 당하지도 않았고 훌륭한 흑인 의사들과 같이 일하며 그들의 환자에 대한 성의와 헌신에 머리를 숙였던 내가, 흑인 대통령에게 두번 다 표를 주었으면서도 은연중에 뿌리를 내린 인종 차별의 근원이 무엇일까?
얼마 전 학회에 같이 참석한 한국인 친구가 흑인 의사를 당연히 호텔 종업원이려니 하고 “여기 물 좀 더 주세요” 해서 얼마나 무안했던가. 색맹으로 시작한 미국생활 오십년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인종 차별주의자가 된 것이나 아닌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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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소아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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