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의 에메랄드그린 나무 주변을 꿀벌들이 계속 맴도는 것으로 보아 벌집이 나무의 어딘가에 있는 듯하다. 하필이면 차를 주차하는 곳이라 벌에 쏘일까 봐 겁도 나고 여간 고역이 아니다. 아무래도 벌집을 없애야 할 것 같아 나무를 살펴보다가 문득 장영희 교수의 꿀벌에 관한 얘기가 생각나서 주춤거린다.
‘꿀벌은 몸통에 비해 날개가 너무 작아서 원래는 제대로 날 수 없는 몸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꿀벌은 자기가 당연히 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날갯짓을 함으로써 정말로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비나 잠자리는 그 날아다니는 모습이 여유롭고 유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꿀벌은 날개가 안보일정도로 열심히 날갯짓을 하는 까닭인지 몸통만 공중에 떠있는 듯하다. 살아보겠다고 그토록 필사적인 노력 끝에 날고 있는 꿀벌들을 차마 없앨 수가 없다. 날씨가 추워지면 벌들이 벌통으로 들어가 겨울나기를 한다고 하니 그때까지 기다리리라.
꿀벌과는 대조적인 이야기로, 어떤 이가 벼룩을 시험해봤다. 뛸 때마다 벼룩에게 높이가 다른 투명한 컵을 씌웠다. 벼룩은 번번이 그 컵의 높이에 부딪혀서 더 높이 뛰지 않고 컵의 높이만큼만 뛰었다. 이제는 벼룩에게서 그 컵을 제거해주었다. 그런데 벼룩은 여전히 그 컵의 높이만큼만 뛰더라고 한다.
살면서 우리는 누구나 꿀벌처럼 사는 시기와 벼룩처럼 사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 꿀벌처럼 자신의 한계와 관계없이 하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 이야말로 보람찬 삶이 아니겠는가.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지만 날고 싶다는 간절함이 비행기를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반면에 사람이 어느 나이에 이르면 능력이든 물질이든 부족한 중에도 자족할 줄 아는 삶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젊을 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오히려 아무 것에도 몰두할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컵 속에 갇히기 전의 벼룩처럼 튀는 시절이었던 것 같다. 열심히 산다고 살아왔는데 돌이켜보면 무엇에 그리 열심이었는지 답이 없다. 꿀벌과 같은 삶을 늘 꿈꾸지만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은 현실이라는 컵 속의 벼룩으로 사는 것 같아 애석할 때가 많다.
육십 대 후반의 나이가 되니,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내 능력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이젠 더 높고 더 넓은 세계를 꿈꾸기보다 내 가까운 이웃들과 정겨운 삶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인생이라는 우여곡절 많은 항해 끝에 어느 지점에 이르니 생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 같아 오히려 평안하다.
<유양희 /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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