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춘방 목사가 지난 1985년 사랑장로교회 목사 시무시 야외예배에서 설교하고 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면서도 자신의 시신을 의대생들의 연구를 위해 기증하셨습니다”
지난 10월21일 올해 9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에서 잠든 이춘방 목사의 장남 이준실 전도사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3개월전에 육신이 땅에서 썩는 것보다는 UC어바인 의대생들의 연구를 위해 시신을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밝혔다.
1924년 8월7일 평안북도 철산에서 부친 이정복씨와 모친 안명호씨 슬하에 9남매중 5남으로 출생한 이 목사는 신앙이 독실한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너는 목사 되어라”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고 한다. 신의주 사범학교를 1945년에 졸업하고 초등학교 훈도(교원)로 일했던 이 목사는 1951년 해병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6.25한국전때 해병대 대위로 무수한 전투현장을 누볐다. 그는 지휘관으로 참여한 원산전투에서 폭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상황에서 부대원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를 들어주시면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서원을 했는데 실제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제대후 부산 신학교에 입학한 이 목사는 사명감에 불타 어느 땐 7개월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노방전도에만 주력하는 바람에 자녀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백일해로 고생하는 등 이도신 사모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심했다.
1961년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 목회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 목사는 1964년 삼척 정라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그의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은 2명의 청년이 목사가 되기도 했다.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시무한 서울 성답교회를 건축할 때는 교인들이 너무 가난한 판자촌 주민들이라 아예 사례금 전부를 건축헌금으로 내고 이도 모자라 헌혈까지 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그는 당시 대한민국 팔도를 다니며 오로지 ‘십자가와 부활’만 전하는 부흥회 목사로 명성을 떨쳤다.
1981년 정원희 목사 후임으로 LA성림장로교회목사로 부임하면서 도미하게 된 이 목사는 이후 일신장로교회, 사랑장로교회 목사로 시무하다가 1989년 65세의 나이로 은퇴하게 된다.
시민권 선서를 하면서 아예 법률적인 이름을 ‘Peace Lee’로 바꾼 이유는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는 예수의 말씀을 살아 생전에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이 목사는 모두 2남(준실,준성) 3녀(옥현,옥인,옥미)의 자녀를 두었다. 자손들 가운데 장녀 사위 장민수 목사, 외손자 장한 목사, 삼녀 사위 최성일 목사 등 모두 3명이 목사인 집안이기도 하다. 이춘방 목사와 이도신 사모는 지난 2016년 5월28일 결혼 70주년 기념식(금강석혼식)을 70여명이 넘는 자손과 친지가 모인 가운데 가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준실 전도사는 “초등학교 교사로, 해병대 장교로, 또 목사로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모습을 보인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며 “이제 더 이상 슬픔과 고통이 없는 천국에서 다시 뵙기를 소원하며 하루하루를 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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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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