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연말에 다가오는 것이 모두 즐거우며 기쁨을 나누는 계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노숙자(Homeless)와 계절성 정서장애(Seasonal Affective Disorder) 등이 그럴 것입니다. 계절성정서장애는 그것이 자기를 괴롭힌다고 인정만 하면 요즘에 와서 치료가 쉬워졌습니다. 그러나 추위에 고통 받는 노숙자 문제는 별개입니다.
1966년에 내가 수련 받던 코네티컷의 한 주립병원의 입원 환자가 약 2400명이었습니다. 1970년 중반부터 이 많은 환자들이 줄줄이 퇴원했습니다. 1980년경에 그 병원은 문을 닫았습니다. 환자들을 더 이상 감금 치료할 수 없다는 진보적 인권운동이 그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1980년 초에 거기서 멀지 않은 뉴욕시의 거리에서 노숙자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들의 이상한 행동, 중얼거리는 모습, 그들의 걸친 옷가지 등을 보고 금방 그들이 주립병원에서 퇴원한, 아니 밀려난 정신병 환자(대개는 조현병과 조울증)들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대부분 이들은 대인관계를 피합니다. 깨끗한 것도 불편합니다. 자주 씻고 청소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가족들은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눈물 나게 불쌍히 보일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자기들을 피해주고 아랑곳 하지 않은 길거리가 오히려 편한 곳입니다. 병원에 있을 때도 그들은 늘 고립을 자초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운 한 예비역 군인이 노숙을 하는 것을 보고 방을 구해 주고 여러 가지 편의를 도왔으나 그는 곧 그곳을 떠나 다시 노숙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알코올은 사람을 피하기 좋은 도구이기도 합니다. 노숙자들에게서 흔히 보는 현상이지요. 그들이 다만 알코올 중독자로 보는 것은 한 면만 보는 흔한 편견입니다.
우리의 자비심, 사랑과 동정은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 합니다. 하나 우리는 우리가 판단하는 모양으로, 우리 나름대로 소위 ‘인권과 자유’를 지켜가며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떠나지 않습니다.
동정과 이해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지금 로마의 교황청에 계신 교황께서 왜 ‘프란체스코’라는 명칭을 택하셨는지 생각해보면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시작하신 성 프란체스코(1811-1182)는 노숙자처럼 하늘을 지붕 삼고 빈곤을 함께하는 사역을 하기 위해 교황청의 편의를 거절하신 분이십니다.
빈곤이 반드시 불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확하고 실질적인 사회운동과 의학, 그리고 위정자들이 맘대로 정의하는 그 ‘자유’보다 우선인 것은 생명의 귀중함과 참사랑이 아닌가 합니다. 살고 봐야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건강해야 자유를 누릴 수 있고, 타인이 정의하는 자유가 무척 부자유스럽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내가 정의하는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는 불편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노숙자의 자유를 이해하고 싶다면 물어 보십시오. 우리가 참 사랑과 참 배려를 참으로 이해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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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욱 / 정신과의사 볼티모어,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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