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이 마냥 기뻐서 떡국 먹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어느 사이 세월에 밀려 해마다 마음만큼은 예전 같지가 않다.
새해에는 아들 식구를 불러 함께 떡국을 먹노라니 어린 손녀들의 입맛에는 영 맞지 않는지 눈만 멀뚱멀뚱 한다. “적어도 나이만큼은 먹어두어야 프리스쿨에도 가고 킨더가든에도 가고, 또 먹고 힘이 세어야 친구들과도 어울려 놀고 공부도 하는 거야.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라.” 할머니의 반 강압적인 기세에 눌려 한입 두입 오물거리며 뜸을 들이더니 급기야는 작은 공기의 떡국 그릇을 깨끗이 비운다. 작은 손녀는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할머니가 함께 놀아 준다는 것이 좋아서 억지로 먹어 준다고나 할까. ‘까짓 것 소화만 되어 튼튼하면 되지.’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이 점차 힘이 든다. 그나마 함께 하는 동안은 즐겁고 기뻐서 하하하 나오는 웃음소리에 절로 반 어린애가 되어 버린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음력설이 돌아오면 이웃집과 떡국을 나누어 먹던 기억이 새롭다. 쟁반 위에 모락모락 올라오는 떡국 김이 행여나 찬바람에 식을세라 놋그릇에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레이스 보자기를 얹어 부리나케 갖다드리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새해 인사를 서로 주고받았다. 그렇게 이웃은 손을 내밀면 반갑게 잡아주고 또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데서 정이 피어났던 동네 인심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변해가고 우후죽순으로 한국에는 하늘을 찌르는 고층아파트가 빌딩숲을 이루고 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라지만 골목이 없어진 공간에는 숨쉬기조차 힘들어진다. 한국의 아파트에서 살 때 잊혀지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하루는 맞은 편 집에 이사를 왔다기에 얼굴도 익힐 겸 자신 있게 만든 호박죽을 가지고 이웃집을 방문했다. 들고 간 그릇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질 때쯤 부시시한 얼굴로 문을 열어준 아주머니의 표정이 예고 없이 찾아 간 내 실수라는 걸 단번에 깨닫게 해 준다. 식탁에 두고 가시란다. 대화도 없이 나오는데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인심에 입맛이 쓰다.
돌아와 생각하면 오지랖 넓은 내 탓이라 잊어버리자 하고 산 이웃이었다. 그 뒤 한참 지난 뒤 느닷없이 그 아주머니는 팥죽을 한 그릇 끓여서 가져다 준 기억은 있지만 아파트 건물이 도시를 점령 할수록 사람 사는 인심이 점점 더 메말라 간다는 걸 느끼게 하는 한 예였던 것 같다.
얼마 전 방송국의 한 프로그램에서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가고 난 뒤 노인들만이 썰렁하게 남아있는 한 평범한 시골 마을을 소개했다. 불편한 몸을 서로 의지하며 성격도 환경도 각기 다른 이웃끼리 모여 일상을 무료하지 않게 즐기는 모습을 보았다. 또 다른 어느 마을에서는 한가해진 노년의 몇몇 할머니들이 한글을 깨우치고 난 뒤, 늦게나마 잠재해 있던 몸속의 끼를 발휘해 시도 쓰고, 그림도 그려 창작의 기쁨을 국내는 물론 이곳 미국에 까지 정겨운 작품들을 들고 와 전시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도 늦은 나이에 글쓰기를 하고 있으니 공감이 남 다르다.
음력설에는 다정도 병이라고 남편은 만류하겠지만 인사성 밝고 싹싹하고 미소가 마음에 와 닿는 선한 인상의 이웃 아주머니 집 현관문을 노크해 보리라. 백김치에 따끈한 떡국을 마주하면, 한국 전통음식 앞에 “나이스”라고 ‘엄지척’하리라 나름대로 믿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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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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